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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여성의 역사를 읽고 미래를 연다

전시도록


'여담재, 매화로 열다' 이동원 작가

관리자 2021-07-22 조회수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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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희신보(梅花喜神谱)


■ 여담재 매화전을 열며

                                                                      한국화가 이동원

나는 흙이고 증발하는 수증기일 뿐이다.


여러 분야의 그림을 공부하면서 특별히 매화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마도 내 삶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군데군데 파인 깊은 옹이는 그간 감당하기 어렵던 상흔 같고 껍질만 겨우 붙어있는 등걸은 견디기 힘겹던 순간들의 고통을, 뒤틀린 가지의 형상은 정처 없이 방황하던 감성의 순간들을, 

그리고 죽은 듯 앙상한 가지는 메마른 삶의 결을 느끼던 순간들이 떠오르며 그간 걸어온 내 삶의 고됨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피워낸 눈부신 옥 같은 하얀 꽃봉오리가 삭막한 겨울의 끝에 눈물겹게 피어난다.


시련이 끝이 없음을 보란 듯 눈보라가 치지만 이제 매화는 시기하듯 내리치는 눈송이를 흩날리는 꽃잎인 양 넉넉히 감싸 안는다. 그리고 의연히 열매를 향한 숭고한 생애를 살아간다.

그렇게 시작한 매화와의 인연이 매화를 그리기 위한 긴 여정을 걷게 했다. 

수묵화를 그리기 위한 서예 공부와 동양 정신의 탐구, 동북아의 매화 자료를 수집하고 

구도와 작가의 의취(意趣)를 연구하며 모사하는 과정과 오래된 매화가 있는 곳을 찾아 사생하며 생장 과정의 특징을 조사하고 나만의 매화를 그리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매화는 가장 친근하고 위로가 되어주는 벗 같은 존재가 되었다.


여담재가 워진 이곳은 2015년 개인전을 준비할 때 인연이 시작된 곳이다.

그때 나는 매화전시에 이어 매화 같은 삶을 살았던 우리 역사 속의 인물들을 조명해 보는 주제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봉 이수광(1563~1628)[1]이 선정 인물 중에 속해 있었다. 

그 당시는 지금의 여담재가 없이 이수광이 살았던 곳이었음을 기념하던 비우당만 아파트로 둘러 싸여 덩그러니 있었는데 비우당과 낙산공원 주변을 여러 차례 답사하면서 

그의 아름다운 삶의 자취를 그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지봉의 숨결을 담을 수 없었던 자료의 한계와 원래의 지세를 찾아보기 어렵던 주변 환경으로 인해 그림으로 제작하지 못한 아쉬움을 간직하게 되었다.


이후 5년, 여담재의 개관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곳이 비우당 옛터라는 것에 반가웠고 개관 기념 전시로 매화전을 하게 된 것도 이수광과의 아쉬웠던 인연과의 개연성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곳이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2]가 폐위되어 살던 곳이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여담재가 정순왕후의 기념관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장소라는 점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역사는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지만 남편의 죽음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아니 생이별로 인해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한 많은 여인의 삶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버려진 그 여인이 

지조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삶을 살았었는지는 더더욱 관심밖의 일이다.


지금도 그러하다 세상의 반이 여자이고 반이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뉴스나 신문지상은 남성우위의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다. 그 많은 여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제한된 사회적 역할이나 억압된 가정 안에서의 희생양으로 살아가길 부지불식간에 강요되어 살아온 것 만은 사실이다. 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육아라는 관문 앞에서는 자발적

백기를 들 수밖에 없는 것이 자아를 실현하고 싶어 몸부림 치는 대부분의 현대 여성들이 겪는 역경이 아니었을까? 과거부터 근대기의 여성들이 남성들과 대등하지 않았던 암울한 사회 분위 속에서도 

꿈을 꾸는 것을 멈추지 않고 처절하게 몸부림쳐 왔기에 그나마도 개선된 지금이 있는 것이고 지금도 이 과정은 계속되고 있다.

뼛속 깊이 시린 추위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는 의지와 정신, 이것이 매화로 말하고자 하는 그것이다.



[1] 지봉 이수광(1563~1628)은 문화백과사전 성격의 『지봉유설』을 통하여 실용 · 실리추구의 정신과 실증정신 · 민본정신 등 무실(務實)의 정신을 역설하며 고증적이고 실용적인 학문태도로 공리공론(空理空論)

만을 일삼던 당시의 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가장 두드러진 내용은 서구 문명을 소개한 것으로 서양 문물에 대한 견문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있는데 조선 중기 실학의 선구자로서 면모를 보여준다.

이수광의 당호는 비우당(庇雨堂)인데 "겨우 비나 피할 수 있는 집"이란 뜻으로 청빈한 생활을 자처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이후 정치적 갈등과 어려운 정국에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으며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유지하여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이자 선비의 자세를 지킨 인물이었다.


[2] 정순왕후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성과 우애가 있어, 가히 종묘(宗廟)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여 단종 원년(1453) 간택되어 이듬해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후 겨우 1년 반 만인 단종 3년

(1455) 6월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함에 따라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에 봉해졌다. 이듬해 성삼문(成三問)등의 단종복위운동으로 세조 3년(1457)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자 부인으로 강봉되었다.

 때 그녀의 나이 18세로 동대문 밖 영도교에서 눈물로 이별하고 영월 쪽을 바라볼 수 있는 이곳 숭인동 17번지(청룡사 옆) 

정업원(淨業院)에 작은 초가를 짓고 3명의 시녀를 데리고 거처하였다. 이것이 단종과 정순왕후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그 해 가을 금성대군이 경상도 순흥에서 다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노산군은 폐서인이 되어 죽음을 당했기 때문다.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암자 동쪽에 솟아 있는 동망봉에 올라가서 영월 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조정에서는 그 정경을 가엾게 여겨 근처에 영빈정(英嬪亭)을 지어 주었으나 머리를 깎은 그녀는 이곳에 한번도 들지 않고, 세 시녀와 함께 초가인 정업원에서 명주를 짜 댕기, 저고리 깃, 옷고름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정업원에서 서쪽으로 300여 미터 떨어진 화강암 바위 밑에 샘물이 흘러나오길래 이 물에 명주를 담갔더니 자주색물이 들었다 한다. 한 많은 일생을 살았던 비운의 왕비는 외로이 1521년 소생 없이 승하하니, 춘추 8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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