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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창신동의 봉제공장과 여성의 봉제노동 // 1. 한국 의류산업의 역사전 전개 과정

관리자 2022-04-05 조회수 64

4. 창신동의 봉제공장과 여성의 봉제노동

 

 ❍ 한국에서 의류산업의 형성 및 전개과정은 물론 창신동 봉제업의 전개 과정과 창신동의 여성노동자의 봉제노동과 삶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함.

 


1. 한국 의류산업의 역사적 전개 과정

 

 ❍ 한국에서 의류산업의 역사는 양장 생산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음. 이에, 의류산업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복에서 양장으로 전환된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음. 이러한 점에서, 의류산업의 역사적 전개 과정은 주로 1950년대부터 논의되어왔음.


 ❍ 봉제업은 산업화 이전부터 가내수공업 형태로 존재했고, 산업화가 본격화되던 1960년대는 한국수출산업의 중심으로 한국경제성장을 주도한 대표적인 산업임. 개발성장의 시대가 지난 현재에도 봉제업은 다품종 소량생산, 주문형 맞춤생산에 맞추어 독립수공업, 대기업 납품 또는 하청 등의 형태로 도심의 주택 곳곳에 잔존해있음. 봉제업은 특성상 손노동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소규모 형태로 사업을 유지할 수 있음. 이 때문에 봉제업은 영세 제조업체의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함(정헌주, 2011: 160).


 ❍ 한국의류산업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섬유산업의 의류부문은 청계천을 비롯한 서울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소규모 회사로 구성됨. 평화시장은 소규모 회사들이 밀집된 남한 의류산업의 중심지였음(전순옥, 2004: 121). 이는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원단과 부자재, 그리고 기술 노동력 등이 서울에 밀집해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임.


 ❍ 1980년대 전반기만 해도 직물과 의복을 생산하는 산업을 섬유공업으로 통칭하였으며, 이중에서 의류 생산과 관련한 업종은 봉제공업과 피복공업으로 각각 불리웠음. 예를 들어, 1984년에 한국섬유산업연합회에서 발간한 <1984년도 섬유공업통계>에는 봉제공업은 한국봉제공업협회가 제작한 통계자료, 피복공업은 한국피복공업협동조합에서 제작한 통계자료를 활용해 발간되었음. 봉제공업은 내수와 수출, 피복공업은 공동판매실적과 수출 항목을 포함하였음.



. 1950~60년대 : 내수 시장 중심의 발전


 ❍ 한국의 의류산업은 흔히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청계천에 모여든 월남민이 재봉틀을 가지고 옷을 수선하고 만들어 팔면서 시작되었음.

  - 동대문시장이 전국적인 의류도매시장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당시부터 청계천변에 하꼬방을 지어 미군복을 염색해 팔던 피난민들이 평화시장을 형성하면서부터임(박승현, 2005: 13). 특히 1961년 평화시장의 개설이 오늘날 동대문시장의 형성을 알리는 직접적인 신호였음(이영훈, 2004).

  -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청계천변에 무허가 판자집 하꼬방을 지어 의류를 생산하고 판매할 때부터 이 시장은 평화시장이라고 불리워짐. 청계천변 하꼬방에서 만든 옷은 대부분 미군복을 염색한 작업복 등이었고, ‘팔만 들어가면 윗도리고 다리만 들어가면 바지인 옷들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음(박승현, 2005: 15).

  - 하꼬방에서의 장사는 청계천 위에 얼기설기 나무판자를 받쳐 놓고 거기에 다락을 매서 꼭대기에서는 미싱을 하고 앞에서는 좌판을 깔고 판매를하거나 개천에 기둥 박아 판을 만들어서 그렇게 거기서 장사를 하고 지하도 만들어서 쓰는식이었음. 그러나 하꼬방은 나무로 지어져 불이 자주 났고 불이 나면 공장이 아예 불타 없어져버렸음(박승현, 2005: 16~17).

  - 1958년에 판자촌 시장에 큰 화재가 발생함에 따라 기존에 있던 평화시장 상우회가 평화시장 재건위원회를 결성하고 하꼬방을 대신해 평화상가 건물을 지음. 1962223일 정시 시장 허가를 받고 청계천변의 상인들이 지었는데, 개별 점포의 소유권을 개인이 가지도록 상가를 분양하는 방식의 등기분양을 실시함. 즉 평화시장주식회사는 상인회를 중심으로 등기분양이 이루어져, 주주와 건물주 그리고 각 점포 작업장의 사업주와도 일치했음. 또한 평화시장의 건물은 칸이 단위였는데, ‘한 칸을 사면 1층의 매장과 2층과 3층의 공장을 한꺼번에 가지도록 분양을 했음(박승현, 2005: 17~18).

  - 특히 평화시장의 각 사업장에는 다락이 설치되어 있었음. 협소한 공간이었으나 따로 세를 내지 않고 더 많은 노동자를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업장에서 다락을 설치하였음(박승현, 2005: 18). 특히 다락은 청계천의 봉제공장에서 근무하는 여성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의미화되기도 했음.

  - 아래의 사진은 일본의 사진작가인 노무라 모토유키가 1973년에 촬영한 평화시장의 봉제공장의 모습임. 작업장에는 잘려진 옷감이 여기 저기 널려 있으며 좁은 다락방에서 작업하는 여성들이 보임. 이 사진은 당시 평화시장의 봉제 관련 작업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알 수 있음



  - 다음은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시다를 소재로 하여 박노해 시인이 쓴 시임. 당시 시다는 어린 나이로 노동자로 일하면서 착취당하는 여성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문학적 재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음.

 


시다의 꿈

 박노해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흘리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려오는 온몸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로
새벽별 빛나다





  - 1962년 당시 평화시장에서 수선집을 차리는데 5,000원 정도(중고 재봉틀 3,300, 운영자금 1,200, 재료비 500)면 차릴 수 있었으며, 매달 6,000정도로 벌어들였다고 함(청계천박물관, 2019: 62). 그리고 1970년대 중반 공임을 살펴보면 바지 100, 잠바 160, 재건복 170, 코트 400, 롱코트 500원이었음(청계천박물관, 2019: 80).

  - 평화시장이 의류도매로 호황을 누리자 평화시장을 모델로 한 의류시장들이 인근에 속속 생겨남. 19624월 동신시장, 19697월 동화시장 주식회사, 그리고 10월에 통일상가, 12월에 성동상가 등이 생겨 평화시장과 함께 생산-판매 체계를 축함(박승현, 2005: 15).

  - 더욱이, 197012월 국내 최대의 원단 및 의류부자재 시장인 동대문종합시장이 생겨 원단과 의류부자재를 더욱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음. 또한 1968년에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경부고속도로의 터미널이 동대문에 자리 잡으면서 동대문 일대의 의류시장은 비약적으로 발전함.

  - 이를 배경으로, 1979년에는 제일평화시장, 1980년에는 흥인시장, 덕운시장, 남평화시장, 광희시장, 운동장 평화시장, 청평화시장 등의 의류 상가들이 개장하여 동대문시장은 전국 최대 규모의 의류도매시장을 형성함(김양희·신용남, 2000: 27~31, 재인용 박승현, 2005; 15).

  - 한국전쟁 이후 한복에서 양장을 입는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청계천은 의류 관련 내수시장의 70~80%를 담당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

  - 1960년대 후반 이후 의류 생산-도매 상가의 잇단 개장은 이 시기를 전후해 국내 기성복 시장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함을 의미함. 평화시장의 영세공장에서 만든 옷은 내수용으로 평화시장의 제품은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대도시는 물론 교통이 불편한 영월이나 철원, 제주도까지 흘러가서 1970년 현재 전국 기성복 수요의 약 70%를 차지함(박승현, 2005:15).

  - 1960~70년대 급성장한 의류봉제업 노동과정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유혈적 테일러리즘(bloody taylorism)’. 노동자들은 최저생계비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으며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으며 민주노조 건설에 앞장선 이들이 여공이라 불리던 섬유의류봉제업의 여성노동자들이었음(김귀옥, 2004: 222). 이 시기 섬유의류봉제업에 종사한 노동자는 미혼의 여성노동자가 상당수 였는데, 84%정도가 미혼의 어린 여성들로 구성되었음(김귀옥, 2004: 222~223).

  - 소비자들이 서울 물건을 찾는데다가 숙련기술공들이 대부분 평화시장 인근에 몰리기 때문에 지방에 분산된 피복제조업자들은 점점 더 동대문시장 주변으로 옮겨왔음(조영래, 1991: 91).

  - 1960~7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 고용주들은 대부분 미싱사나 재단사 출신이기 때문에, 직접 재단이 봉제, 판매를 했음. 또한 남편이 재단을 하면서 공장장을 겸하고 부인은 점포 관리나 판매를 담당하는 등 부부가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았음. 미싱사끼리 혹은 재단사와 미싱사가 결혼을 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들은 재봉틀 한 대로 시작으로 부부가 함께 공장을 차렸음. 그리고 식구가 많은 경우 언니가 미싱을 하고 동생이 시다를 하는 등 가족 모두가 참여해 가족경영을 하는 경우도 흔했음. 그리고 친인척을 고용해 작업장을 통제하기도 했음(박승현, 2005: 21).

  -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에 대한 이미지화는 국가-고용주-지식인의 공모에 의해 만들어졌음(김원, 2005: 692~693). 여성노동자들은 육체적 노동가동가 센 일을 하는 존재로, 남성 관리자의 입에 밴 상소리와 언어적 모욕이 일상화된 공장에서 여성다움을 갖고 가꾸기란 쉽지 않음. 공장안의 남성들은 여성노동자들을 여자 같지 않은 여자로 비웃기도 함(장미경, 2006: 226~227). 더욱이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을 두고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으로 여겨졌으며, 여성노동자에 대한 성폭력은 노동통제의 일환으로 작동했음(장미경, 2006: 231~240).

  - 1970년대 내내 평화시장은 남한 기성복 생산과 도매의 중심지였음.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가 함께 생산 및 판매 체계를 구성했는데, 이 안에 많은 소규모 공장과 도·소매점들이 밀집해있었음. 평화시장은 이후 전국 기성복 시장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함(전순옥, 2004: 128). 1970년 당시 봉제공장은 428개였으며, 노동자는 약 7,600명으로 알려짐. 그러나 전태일의 조사에 따르면, 860개에 달하는 공장이 운영되었고 노동자는 총 26,800명으로 공식집계보다 3배나 많았음. 법정 최고인원의 2배 이상이 넘어선 수치였음. 고용된 26,800명 중 85.9%14~24세 사이의 여성들로, 절반이상이 18세 미만이었음. 남성들은 주로 관리자, 재단사, 시아게 등을 하고 여성들은 시다, 미싱사, 미싱사 보조 등이었음(전순옥, 2004: 130~131).

  - 다음의 표는 청계천에 위치한 봉제공장의 직능별 남녀구성비율을 보여줌. 재단사는 전체의 4.9%의 인력을 구성하는데 전원 남성이며, 미싱사는 35.3%이며 이 중에서 여성이 31.5%를 차지하고 있음. 특히 시다는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데 여성 시다가 42.1%로 시다의 대부분이 여성임을 알 수 있음





  - 유교적 윤리로 정의되는 전통과 경제 팽창을 위해 박정희 정권이 주도한 산업적 근대화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남한 사회에는 문화적, 사회적 대변혁이 일어났음. 이러한 변혁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은 수만명의 어린 소녀와 젊은 여성들을 수용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섬유·의류산업일 것임(전순옥, 2004: 159).


 ❍  다음은 1960~70년대 의류산업에 관한 통계자료임.

  - 의복류제조업에 종사하는 종업원은 196313,649명에서 1966년에 33,578명으로 2.5배 정도 증가했으며, 특히 생산직의 여성 종업원의 수는 4배 가까이 증했음을 알 수 있음.





  - 의류제조업에 종사하는 여성종업원의 증가와 함께 의복 수출액도 급격하게 증가했는데, 1960~70년대 의복 수출액은 1964660만 달러에서 1979년에는 287천만 달러로 430배 가까이 증가했음. 특히 1970년에서 1974년 의류산업의 성장은 516.4%에 이름(전순옥, 2004: 120).




  - 미상의 1974년 당시 월수입은 미싱사가 70,400원이었으며, 보조미싱사는 10,000원이었고, 상급 시다는 7,500원으로 미싱사와 10배 가까이 차이가 났음.








. 1970년대부터 ~ 1980년대 중반 : 수출 중심의 의류산업의 구조 형성

 


 ❍  이러한 가운데, 박정희 정권에 접어들면서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을 펼침에 따라 청계천의 의류산업은 더욱 번창함.

  - 1960~70년대 정부는 수출위주의 정책을 펼쳤고, 1962~1966년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1967~1971년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한국 경제는 급속한 성장을 이룸(이옥지, 2001: 86).

  - 의류산업은 1980년대 후반에는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제2위 규모의 수출을 하게 되었으며, 세계 총 의류 수출액의 약 10%를 차지한 적도 있음. 이 시기 의류 수출은 주로 외국 바이어의 주문에 의존해 해외 시장에 저가격 위주의 저급품으로 판매해왔음. 대량생산 방식의 저임 노동력에 기반한 수출에 특화한 것으로 선진국의 국제 하청공장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성장한 것임(전명숙, 2000: 203).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점차 약화되기 시작함.

  - 의류봉제업 수출기업 가운데, 대표적인 기업 중의 하나로 반도상사가 있음. LG그룹에 속한 반도상사는 1970년대에 부산, 부평, 춘천 등에 공장을 갖추었음. 특히 부평공장은 1969년 국가주도의 수출정책 추진에 따라 준공된 인천의 부평공단 안에 설립되었음. 19695월에 설립된 반도상사의 부평공장은 미국 및 일본 수출용 가방 및 블루진을 생산했음. 80~90명에서 출발해 1970, 1971년에 2~3천명으로 노동자가 증원되었으며 성비는 20:80이고 여성들은 생산직에 근무했음. 그러다가 1973년 전후로 가발수출이 저조해지자 의류봉제부를 새로 설립하고 가발부는 하청화하고 의류봉제업으로 업종 전환을 하였음. 당시 내수용 의류로는 남성고급양복, 기성복, 피혁의류제품, 레자 등 비교적고급소재 의류를 생산하였음. 의류봉제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가 1,400여명이 감축되기도 했음(김귀옥, 2003: 226~227).


 ❍  그러나 석유파동 등 국제정세의 변화와 함께 수출 위주의 의류산업은 1970년대 말부터 위축되기 시작하였으며, 의류수출산업에 진출했던 대기업은 국내의 내수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함.

  - 1970년대 후반 국내 기성복 시장이 대기업 브랜드로 재편되어갈 무렵, 해외시장에 섬유를 수출했던 섬유기업이 기성복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함. 코오롱상사, 제일모직, 부흥사, 파일상사, 경남모직, 대한모방 등이었음. 1978년 제2차 석유파동으로 수출에 제동이 걸리면서 국내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임(양미경, 2017: 193~194).

  -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196026.8%에서 197545.7%로 크게 상승하였음. 남성은 같은 기간에 73.5%에서 77.8%로 소폭 증가한 것과 비교해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대단히 활발했음을 추정할 수 있음. 그리고 섬유의류제조업 부문에서 여성의 비율이 높은데, 1979년 전체 제조업 부문 총 종업원 2039,831명 중 904,582(44.3%)이 여성이었음. 그리고 제조업의 경공업에 종사자의 64.4%가 섬유 의복 업종에 종사했음. 1977년 섬유의류봉제업종 부문에 종사한 여성은 69.5%에 해당했음(김귀옥, 2005: 25).


 ❍  이로 인해, 대기업과 청계천의 영세한 소규모 봉제공장 사이의 경쟁이 확대되었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대기업은 브랜드를 가진 제품을 생산하는 곳으로, 청계천은 노메이커 제품을 생산하는 곳으로 이원화되었음.

 ❍  1988년 당시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진행된 봉제공장에서 여성노동자에 대한 실태조사 (탁아소 개구쟁이어린이방, 전순옥)에 따르면, 노동시간이 하루 12~14시간 정도이며, 임금은 한 달에 15~20만원 정도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남. 이는 긴 노동시간과 나쁜 근로조건으로 여성노동자의 90%가 위장병, 호흡기병, 만성피로, 피부병 등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드러남. 특히 피부병은 원단에 묻은 유독물질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나타남. 미혼여성은 교육의 기회를 더 갖기를 원했으며, 결혼 후에도 직장을 계속 다니겠다는 응답자가 78%로 높게 나타났음. 기혼여성노동자는 갓난아이를 맡길 수 있는 탁아소와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지도할 수 있는 공부방의 필요성을 강조함. 특히 가정집 안에 위치한 공장은 다락처럼 칸을 만들어서 사용하다 보니 허리도 펼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한 점이 문제로 지적됨.




.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 내수 시장의 급성장 



 ❍  한국의 의류봉제업은 영세화, 하청화, 해외 현지화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추세임(김귀옥, 2004: 222).


 ❍  특히 의류산업은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중소기업의 비중이 증가하였음. 특히 1986년에서 1991년 사이에 의류 업체 수는 5천여 개가 증가한 반면에 종사자 수는 2만여명 정도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남. 이때 증가한 사업체의 규모는 50인 이하 규모의 업체에서 두드러짐(전명숙, 2001: 201).

  -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 것은 기존의 수출 중심 대규모 의류업체가 점차 내수로 전환하면서 자체 공장의 시설을 축소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임. 그리고 이미 내수시장에 참여하는 업체나 신규 업체도 공장의 규모를 축소하고 기업 외부에서 생산하는 방식을 선호함. 내수 시장의 성장과 함께 다품종 소량 생산과 고급화와 패션화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임. 따라서 국내 내수용 의류의 상당수가 소규모화된 중소 의류업체에서 생산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전환을 겪고 있음(전명숙, 2001: 203).


 ❍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의류산업은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저임금 인력시장을 가진 국가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음. 디자인과 브랜드를 앞세운 다품종 소규모 생산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음.


 ❍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집중되었던 의류를 생산하는 업체는 서울시 전역으로 흩어져 있음.


 ❍  봉제업체에 종사하는 종업원의 성별 현황표를 살펴보면, 2010년대에는 지속적으로 감소추세에 있음을 알 수 있음. 봉제업체의 ‘4인 이하‘5~9규모의 사업체에 근무하는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는 반면에, ‘10인 이상규모의 사업체는 전반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을 알 수 있음.




. 2019년 현재 한국 봉제업체의 현황

 


 ❍  국내 의류봉제업체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인력감축을 통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중견업체가 중소업체로, 중소업체가 영세업체로 전환되면서 영세업체 위주로 재편됨. 5인 미만의 가족생계형업체73.8%를 차지함.


 ❍  국내 봉제업체는 서울 권역에 가장 많이 몰려있으며, 업태로는 의류봉제가 92.5%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함. 그리고 여성정장 생산 비중이 타 복종에 비해서 높은 편임.


 ❍  ‘2000년대 이후 설립된 업체는 전체의 71.9%를 차지하고 있으며, ‘1990년 이전(20년 이상)에 설립된 오래된 업체9.5%에 그침. 이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인건비 상승, 생산인력 충원의 어려움으로 인해 생산업체들이 중국과 인도네시아 등 후발개도국으로 이전한 데서 기인함.


 ❍  의류봉제산업은 전반적으로 7~8월과 1월이 가장 심한 비수기이며, 최대 성수기는 3~5월과 9~10월인 것으로 나타남.

국내 봉제업체의 유통 채널은 소비자 직접 판매비중이 35.9%로 가장 높았고 그 다음으로 재래시장’(27.1%), ‘브랜드업체’(14.6%), ‘타봉제업체납품’(13.1%), ‘인터넷쇼핑몰’(5.4%) 순으로 나타남. ‘부띠끄1.8%에 그침.


 ❍  국내 봉제업체에 종사하는 인력의 성별현황은 여성 61.4%(11,662), 남성 38.6%(7,322)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더 많이 종사하고 있음. 업태에서는 여성들이 의류봉제 분야에 가장 많이 진출하여 63.9%를 차지하고 있으며, 남성들은 패턴 및 재단전문업체에 57.9%의 비중을 차지하여 높은 비율을 차지함.

국내 봉제업체에 종사하고 있는 인력의 연령별 상황을 보면, 5043.5%, 60대 이상 27.5%, 4016.6%, 308.9%, 20대 이하 3.5%로 신규 유입 단절과 함께 고령화 현상이 높게 나타나고 있음.

  - 낮은 임금수준, 근무환경 열악, 미래의 불확실성, 봉제업체에 대한 젊은 층의 기피 현상 등으로 신규인력 유입이 단절되고 있음.

  - 업태별로 살펴보면, 의류봉제업체는 ‘50대 이상종사자 비중이 81.5%로 가장 높은 반면, ‘30대 이하비중은 6.0%에 불과함. 패텁업체는 ‘30대 이하 종사자 비중이 41.1%로 높은 편임.

  - 복종별로는 남성정장과 유니폼의 고령화가 상대적으로 심하고, 유아복의 경우 20~30대 청년층 비중이 높은 편임.


 ❍  국내 봉제산업의 생산관리자 임금 수준은 월평균 236만원으로, 제조업 평균 266만원의 88.7% 수준에 불과함.

  - 직종별로는 디자이너는 월평균 265만원으로 의류 직종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고, 그 다음으로 패턴사 262만원, 재단사 256만원, 영업 242만원 순으로 나타남.

  - 봉제사와 링킹사는 숙련공이 각각 211만원, 230만원으로 다른 직종에 비해 낮은 수준임. 특히 비숙련공은 각각 170만원, 189만원으로 크게 낮은 수준임.


 ❍  국내의 봉체업체들은 높은 임대료 부담 때문에 지층이나 ‘2층 이상의 주택에서 생산활동을 하는 비중이 높음.


 ❍  국내 봉제업체의 공장 규모는 평균 40.7평으로 매우 영세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대부분 공장을 월세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