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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사자료실

지나온 여성의 역사를 읽고 미래를 연다

여성사자료

제3장. 창신동과 여성의 역사 // 2. 창신동 여성의 역사

관리자 2022-03-31 조회수 71

2. 창신동 여성의 역사

가. 창신동의 인구와 성비 현황

 ❍ 2019년 현재 종로구에 위치한 창신동의 인구수는 총 23,149명으로, 남성 11,814 명, 여성 11,335명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약간 더 많음.

 ❍ 창신동은 1995년도 이래 계속해서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음. 특히 창신1동은 거의 절반 가까이 감소했으며, 창신2동과 창신3동 역시 감소하고 있는 추세임.  

 ❍ 창신동의 세 개의 동에서는 창신2동이 9,799명으로 인구가 가장 많고 창신3동 (7,271명), 창신1동(6,079명) 순임.

  - 창신동의 여성 인구수는 창신2동이 4,82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창신3동 (3,683명), 창신1동(2,827명) 순임.


나. 창신동에 위치한 여성 관련 유적·주요 기관·노동

1) 조선시대

 ❍ 조선시대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25)26) - 정업원(淨業院, 숭인동 17-1) : 1457년 단종의 죽음 소식을 접한 17세의 단종 비 여산 송씨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오늘날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로 유배되어 근처에 정업원이라는 암자를 짓고 비구니 스님으로 시녀들과 함께 지냄. 그녀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동대문 시장 상인들의 포목을 염색해주는 것으로 업을 삼음. 아침저녁 숭인동의 동망봉(東望峯, 숭인동)에 올라 동쪽 영월을 향해 남편의 명복을 빌며 살다가 1521년에 82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침.

 - 여인시장(동묘부근 숭신초등학교 앞) : 왕후가 시녀 셋과 끼니조차 어렵다고 소문이 나자, 마을의 여인네들이 ‘여인시장’을 염. 남자의 출입을 금한 여인들 만의 채소시장이었음. 왕후 일행을 감시하는 포졸의 눈을 피해 몰래 돕기 위한 것이었음. 왕후의 시녀들은 이곳에서 채소며 쌀 등 양식을 얻어감. 지금은 헌책방과 잡상 만물전이 운집한 벼룩시장이 되었음.

 - 자지동천(紫芝洞泉, 창신3동 7번지) : 송씨 왕후를 돕는 움직임은 동대문 옷감 상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남. 상인들이 옷감에 물을 들이는 일을 왕후에게 맡김. 왕후는 청룡사 북서쪽 낙산 기슭에 있는 자지동천과 그 일대에 깔린 자지초(紫芝草)를 이용해 염색임을 할 수 있었음. 현재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 고 이름 붙인 우물이 남아있음. 송씨 왕후는 자지동천 우물물로 염색일을 하며, 남편 단종의 삼년상을 원각사에서 마칠 수 있었음.



 - 영빈정 : 조정에서 단종비 정순왕후를 위해 영빈정을 지어줌. 조선 6대 단종이 영월로 유배당한 뒤 그의 비 정순왕후 송씨는 창신동에 자은 초가를 짓고 날 마다 단종의 명복을 빌었음. 조정에서는 그 정경을 가엾게 여겨 근처에 영빈정을 지어주었으나 송씨는 이곳에 한 번도 들지 않고 생을 마감함.

  - 영도교(영도교, 숭인동 234번지) : 청계천 하류 쪽에 놓여진 영도교도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을 지켜본 현장임. 세조3년(1457년)에 노산군(魯山君)으 로 강등된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가는 길에 아내인 정순왕후를 마지막으로 보 게 됨. 이후 사람들은 단종과 왕후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청계천의 다리를 ‘영 이별다리’, ‘영영 건넌 다리’로 부름





2) 식민지 시대

(1) 조선여자의학강습소3의 이전 (1928~1933년까지 창신동에 위치)

❍ 192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 설립

  - 1928년 4월 14일 시내 명월관에서 로제타 홀을 비롯한 조선의 의학인들이 모여 조선의 여성전문교육기관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두 번의 회의를 더 거쳐 1928년 5월 19일 종로구 서소문정 41번지에 위치한 김병원(김탁원 운영)에서 로제타 홀 여사와 허영숙, 정자영, 김순복 여사 등 16명이 참여하여 조선여 자의학전문학교 기성회 조직과 발기대회를 가졌음.

 - 1929년 3월 23일에 약 1년간 준비해 오던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의 첫 수업식이 창신동 132번지 ‘엘라 루이스' 부인의 저택에서 시작되었음. 총 15명의 여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이들은 모두 예과를 마친 사람들로 본과 4년 과정 중 1학년 으로 시작할 예정이었음. 의사시험에 합격한 여성 두 명은 ‘조선여자의학강습 소'의 첫 졸업생인 박순정'과 ‘임용화'임.

  - 특히 로제타 홀은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의 설립자이자 소장으로, 1890년 26살 의 나이로 의료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을 찾았음. 남편인 윌리엄 제임스 홀은 1 년 뒤인 1891년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며, 3년간 의료 선교사 활동을 하다가 1894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됨. 한 달 뒤 로제타 홀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며, 미국으로 가며 조수로 있었던 김점동을 데려가 의학 공부를 시켜 조선 최초의 여성 의사를 탄생시키게 됨. 이 여인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인 박에스더임. 그 후 미국에서 의료활동을 하던 로제타 홀은 1897년 11월 10 일 다시 조선을 찾았으며, 평양에 여성치료소인 광혜여원을 열었으며 조선에 맞는 점자법을 개발해 시각장애인을 위한 학교를 설립함. 또한 지금의 이화여 대부속병원인 동대문부인병원을 설립하고 운영함. 그 와중에 여성 의료 전문 인의 필요성을 느껴 김탁원, 길정희, 허영숙, 정자영 등과 함께 여성의료전문교 육기관 설립에 힘쓰게 됨. 이들과 함께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하게 되며, 1928년부터 미국으로 돌아가는 1933년까지 운영했음.

-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1933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개칭되었으며, 같은 해 에 관철동으로 이전하였음. 1941년 9월 1일에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부속병 원을 개원했으며 1948년 5월 서울여자의과대학 부속병원, 1957년 1월 수도의 과대학부속병원으로의 개칭과 증축을 통해 남녀 의사를 배출하며 인술로 많 은 환자들을 치료했음. 1967년에는 수도의대를 거쳐 국학학원을 인수해 종합 대의 모습을 갖춘 우석대 의과대학은 1971년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에 인수 되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포함됨.





(2)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의 이전

❍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1933년부터 1986년까지 창신동에 위치함)

 - 1908년 4월 28일 동원여자의숙으로 개교하였으며, 1909년 4월 1일 동원여자의숙을 병합함. 1926년 4월 27일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인가를 받고 1933년 10월 14일 동대문 창신동에 본관을 준공하고 교사를 이전함. 동덕여학교는 민간인에 의하여 설립된 최초의 여학교임.

  - 동덕여중고가 있던 창신1동 225번지 일대는 새말 혹은 신촌(新村)이라 불렸는데, 이는 동덕여학교를 짓기 위해 부지를 물색할 때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새로 형성하여 살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인됨.

  - 1946년 10월 29일 동덕여자중학교(6년제)로, 1951년 학제 변경에 따라 중학교와 분리되어 동덕여자고등학교(3년제)로 개편됨. 1986년 강남개발 촉진책의 일환인 강북 도심 학교 이전 정책으로, 방배동 신축교사로 이전(방배3동 산82번 지)하고 그 부지에는 종로구민회관과 보건소 통합청사가 들어섬.





❍ 특히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의 졸업생 중에는 2006년에 여성독립운동가로 추서 된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이효정이 있음.

  - 이효정(1913~2010)은 1913년 경상북도 봉화 춘양 출생으로 동덕여고보 재학 당시 백지동맹사건에 참여했으며, 졸업 후에는 사회주의 운동단체인 경성 트로이카의 일원이었음. 1933년 9월에는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여성 직공파업 을 주도한 바 있음. 여공 500여명이 임금문제로 총파업에 돌입한 사건으로, 이효정은 이후 동대문 경찰서에 체포되어 고문을 겪은 바 있음. 이효정은 2006년 정부로부터 추서된 이후 여성독립운동가로서 추모와 기록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

  - 박진홍(1914~사망 시점 미확인)은 이효정과 친구 관계로 동덕여고보를 졸업한 뒤 1930년대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을 했던 여성으로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임.



(3) 중앙보육학교(中央保育學校)의 이전 (1932년부터 1938년까지 창신동에 위치함)

❍ 중앙보육학교가 창신동으로 이전하여 운영됨.

  - 종로구 인사동의 중앙교회에 설치한 중앙유치원을 모체로 1928년 중앙보육학교로 인가되었으며 입학 자격은 여자고등보통학교(또는 고등여학교)를 졸업 정도였으며, 수업 연한은 2년이었음. 1932년에 교사를 창신동으로 이전하였음. 임영신(任永信, 1899~1977)은 1935년 4월에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고 교장에 취임하였음. 1938년에 흑석동에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하였으며 광복 후 중 앙여자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가 오늘날의 중앙대학교로 발전함.

  - 중앙보육학교의 전신은 종로의 중앙유치원 내에 설치된 중앙유치원사범과였 음. 1928년 9월 박희도(朴熙道) 외 3명이 중앙보육학교로 인가를 받아 정동 1 번지로 교사를 이전하였음. 수업 연한 2년에 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자를 대상 으로 모집인원을 50명으로 하였음. 1930년 1년제 음악과를 신설하고 이어 1년 제 선과(별과라고도 함)를 두어 본과(보육과) 40명, 음악과 30명, 선과 20∼30 명을 각각 모집함. 교육과정은 윤리학·교육학·아동심리학·음악·보육학· 영어·미술·자연과학·율동유희·동화·수공·일본어·실습 등을 주당 32시간으로 구성하였으며, 특히 음악과 율동유희에 비중을 두어 교수진도 음악 담당이 가장 많았음. 당시 음악담당 교사는 독고선·홍난파(洪蘭坡)·이영세 등 이었음. 졸업생은 매년 20명씩 배출되었고, 대부분이 유치원교사로 취직함. 학생·교수·중앙유치원생 등이 함께 하는 음악회·가극회 등의 발표회를 자주 개최하였으며, 전국순회공연도 하는 등 활발한 학생활동을 하였음.

  - 임영신은 대표적인 여성인물 중의 하나로 전주의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를 졸업했으며 1919∼1921년 일본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 1925∼1931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과 대학원 등에서 공부했음. 이화학 당(梨花學堂)에서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으며, 1933년부터 조선여자기독교청년 회연합회(YWCA) 총무 등을 역임함. 1945년 10월 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으며, 1948년 8월 상공부장관이 되었으나 1949년 6월 장관직에서 물러 났음. 1950년의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되었고, 1950년 2월 상공일보사 (商工日報社) 사장, 1952년 여성계사(女性界社) 사장 등 언론계에도 관여한 경력을 가진 인물임.






3) 해방 이후

(1) 창신동에 등장한 사창가

 ❍ 1950년대 사창가의 등장하여 1970년대 이후 점차 사라져감

  - 1950년대 후반부터 창신동 일대에는 사창가가 형성되었음. 미군정기 식민지 시대에 도입된 공창제가 폐지되면서 창신동을 비롯하여 돈의동, 영등포지역, 동인천 및 부산진역 부근에 사창가가 들어서기 시작했음. 창신동 430~470번지 일대에도 기동열차 궤도변의 판잣집을 중심으로 사창가가 밀집하기 시작하여 1970년대까지 유지되었음.

  - 평화시장 근처인 창신동에 사창가가 있어, 창신동에 사는 부모들은 딸들의 외 출과 옷차림을 단속하기도 함. 1957년에 창신동으로 이사를 와서 한 평생을 창신동에 살았던 어윤광은 “색시가 바글바글해. 색시들 하고 기둥서방들이 엄청나게 있는 거야. (중략) 그때는 17살이니까 다 컸잖아. 그때 우리 큰 오빠가 무서웠는데 저녁에 해만 지면은 못나가게 해. 그때 나는 치마도 못 입었어. 우리 친정어머니가 다리 보인다고 긴 바지에다가 긴 치마를 집에서도 입게 했어. 그때는 이 동네가 낮에도 나가 서 있기 무서운 동네였어. 그래서 이모 네 집에 가서 4년을 살았어.”며 당시를 기억함.

  - 그러나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1년에 윤락행위를 금지46)하면서 점차 쇠퇴하여, 사창가는 숙박업 등으로 용도변경을 하여 오늘에 이름. 여기에는 주거가 불안정하고 일자리의 이동이 많은 도심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하층 노동자 들의 주거공간으로 쪽방촌이 형성되기 시작했음. 





(2) 양지회관 (陽地會舘)

❍ 양지회관의 건립 (창신아파트 바로 맞은편, 숭인동 55의 2)

 - 양지회관은 1965년에 근로여성 실비합숙소로 세워졌음. 1970년대에는 여성근로자복지관으로 사용되었으나, 이후에는 종로여성복지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음.

 - 지상 3층과 지하 1층으로 구성된 양지회관은 서울시가 운영을 맡아함. 200명 정도의 여성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임. 현재 건물은 존재하지 않음.






(3) 배성여자상업고등학교

❍ 1966년 배성여자상업고교의 설립 (현 서일정보산업고등학교, 창신3동 13)

- 종로구 창신3동에 있는 사립고등학교로 1966년 12월 8일에 배성여자상업전수 학교로 개교함. 1983년 배성여자상업학교로 변경, 2000년 11월 현재 서일정보 산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함.

- 배성여자상업고등학교가 자리한 자리는 부락제를 지내던 도당(都堂)자리였고 도당이 있는 고개이므로 당고개라고 칭함. 농구팀의 활약이 두드러졌음.


(4) 봉제업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를 위한 시설 및 기관

❍ 참여성노동복지터: 전태일의 동생 전순옥이 2003년에 설립한 기관으로, 여성노 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하여 저소득층 가정의 어린이, 이주여성과 다문화가 족 등으로 복지사업이 확대되었음. 

❍ 지역아동 탁아소 및 어린이 공부방 - 창신동에는 여성봉제노동자의 자녀를 위한 공부방 ‘참신나는학교’와 개구쟁이 어린이 공부방 등이 세워져 운영되었음. 

❍ (사)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 : 2006년에 참여성노동복지터 내에 ‘수다공방’을 개설 하고 봉제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봉제기술의 고급화를 이끌었으며 ‘수다공방 패션쇼: 창신동 아줌마 미싱에 날개를 달다!’를 개최함. 이후 지속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독립적인 봉제기술전문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음.

❍ 봉제여성새로일하기센터 : 2014년 1월에 창신3동 여성가족부와 디아지오코리아 의 지원으로 개소되었으며, 한부모가정과 결혼이민여성 등 취업 취약계층 여성 의 자립지원을 위해 취업상담과 봉제업체 현장 맞춤훈련 등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설되었음.


나. 창신동 봉제공장의 여성봉제노동자에 관한 전시 및 영상/ 영화 작품

 ❍ 창신동 여성봉제노동자에 관한 전시, 연극, 영상, 영화 등 문화적 작품의 생산은 거의 대부분이 2000년대 이후, 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이 많음. 이는 최근에 들어서야 창신동은 물론 창신동의 여성봉제노동자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 전시

  - 2019년 전태일기념관에서 주최한 전태일 50주년 기념 전시 <시다의 꿈> 소개54) :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30여 년간 봉제업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 김경 선, 박경미, 장경화, 홍경애 4인의 이야기를 중심에 두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봉제공장의 ‘시다’(보조원)로 봉제업에 발을 들였고, 노동야간학교 ‘시정의 배움터’를 통해 현장에서 겪는 부당함에 맞설 힘을 배웠으며, ‘청계피복노조’를 통해 행동했습니다. <시다의 꿈>에는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참여했으며 네 여성노동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업을 전개합니다. 1층에는 사진가 전경숙 과 네 명의 여성노동자가 협업한 사진 작업이 펼쳐집니다. 전경숙은 ‘시정의 배움터’ 강학(교사)로 네 명을 만나 이들의 현재를 담은 사진을 광목천에 인화 했습니다. 네 명의 여성노동자는 자신의 사진 위에 재봉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장식했습니다. 네 명의 여성 소설가 이주란, 정세랑, 조해진, 최정화는 네 명의 여성 노동자를 각각 인터뷰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의 역사와 한국 노동현실을 소설로 재탄생시켰습니다. 3층에서는 네 명의 소설가와 네 명의 여성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네 개의 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방은 소설가의 언어와 여성노동자의 이야기를 관람객이 가장 효과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고안된 구조물로, 내부에는 소설을 펼쳐두고 개인적으로, 또는 공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시각적 장치를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반재하 작가는 자 신의 사회적, 경제적 환경을 기반을 이용하여 베트남의 노동 환경을 들여다보고, 그 과정에서 레디메이드 셔츠의 모방품을 단계별로 아웃소싱함으로써 노동을 재현합니다(전시기간 : 2019. 12. 20-2020. 3. 29)


❍ 연극

  - 2000년대 이후 창신동을 소재로 한 문화예술작품이 만들어지고 있음. 극단 작은신화의 <2013 우리연극만들기 창작극 발굴 프로젝트>로 ‘창신동(박찬규 작, 김수희 연출)’이 선정된 바 있음.


❍ 영상

 - 2010년 KBS 방송 <다큐3일 : 서울 창신동 봉제공장 누나들을 만나다 (2010.03.30. 방송)> 소개 : 훈훈한 분위기 속의 사장님 부부, 동생의 학비와 어머니의 약값을 벌기 위해 귀화한 베트남 동서, 같은 일을 하다가 첫눈에 반 한 남편과 함께 40년이 넘도록 재봉 일을 해온 아주머니… 서울 동대문의 화려한 조명 뒤 그림자처럼 오랜 세월을 지켜온 골목 창신동. 미싱소리 가득하던 이곳은 어떻게 변했을까? 3월 14일 방송되는 KBS 2TV '다큐 3일'(연출 유 성문)에서는 큰 빌딩 하나 없는 창신동에 자리잡은 3,000여개의 봉제공장,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일하고 있는 '누나'들을 만났다. '다큐 3일'은 돈을 벌기 위해 연고도 없는 서울에 무작정 상경했던 '누나'들이 우리 시대와 집안을 일으킨 원동력이라고 전한다. 또 제작진은 '공순이'라고 불리며 3,500원의 월급 을 받으며 일했던 '누나'들이야 말로 이 시대의 산업역군들'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다큐 3일'에서는 2010년 서울 창신동 골목을 찾아 변화된 모습을 담아 보고 여전히 꿈을 갖고 일하는 '누나'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방송은 3월 14일 오후 10시 25분.

 - 2020년 영화 <실> (감독 이나연, 조민재)58)59) : [손시내/ 서울독립영화제2020 예심위원, 프로그램 노트] 어두운 작업실의 셔터가 오르고 영화가 시작되면, 실타래에서 풀려나온 것 같은 글씨체로 영화의 제목 ‘실’이 뜬다. 이나연, 조민재 감독이 공동 연출한 <실>은 봉제 노동자인 명선과 그 주변 동료들의 노 동, 일상, 그리고 창신동 봉제 골목의 풍경을 담아내는 영화다. 이때 ‘실’이란 이들이 만들어 내는 옷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단어이면서, 창신동이라 는 공간에서 옷 만드는 노동을 해 온 여성들의 몸과 기억을 타고 이어지는 역사를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세월의 흔적이 빼곡한 좁지만 알찬 작업실 에서 명선은 갓 내린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재단하고 재봉하며 디자이너로부터 의뢰받은 옷을 만들고, 일감과 애환을 나누는 사람들을 만나 수다를 떤다. 몸에 익은 동작들은 그 자체로 대체할 수 없는 리듬이 되어 영화의 세부를 채우고,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애정 어린 대화는 영화에 다정한 활력을 불어 넣는다. 이는 실제 봉제 노동자이자 조민재 감독의 어머니인 김명선이 영화 속 인물 명선을 연기하는 배우로서 작업에 참여한 것과 분리할 수 없는 결과 일 테다. 이처럼 <실>은 실제 삶을 멀찍이 떨어져서 관찰하는 것을 넘어 영화 만들기라는 작업 속에 그 삶의 모양을 적극적으로 담아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그 안에는 창신동에서 봉제 공장을 운영하다 다른 곳으로 떠나가는 이, 새로 공장을 차리고 생활을 이어 가는 이, 이주민으로서 오랜 시간 창신동에서 삶을 일구어 온 이의 이야기가 모두 들어 있다. 외부의 시선으로 간단히 틀지어지지 않는 공간과 인물의 역사와 호흡을 마주할 수 있는 작품이다.



- 한국영화 <어머니>(2011, 태준식 감독) : 전태일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를 주 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작품임. 




- 일본영화 <어머니-분노가 타오른다> (1978, 김경식, 나카오 슌이치로 공동감 독) :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을 주인공으로 한 일본영화 <어머니-분노 가 타오른다>(1978, 김경식, 나카오 슌이치로 공동감독)는 1978년에 일본에서 제작돼 전국적으로 상영운동이 일어나는 등 당시 뜨거운 관심을 모은 작품으 로, 2020년 하반기에 전태일재단에서 발굴해 국내 최초로 상영을 하기도 했음.




3. 소결

 ❍ 조선시대 이래로 창신동은 동대문을 경계로 성곽 밖 마을로 형성되면서 도시화 되는 과정을 겪었음. 이를 통해 도시 한옥이 들어서는 등 일부 부유한 계층이 살기도 했지만, 해방 이후 주로 도시하층민인 노동자와 빈민들 그리고 성매매 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모여 사는 도시지역이었음.

 ❍ 창신동은 성곽밖 마을로 지대(地代)가 저렴하고 서울 사대문과 가깝기 때문에 학교 재정이 열악했던 여성교육 관련 기관이 들어서는데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었음. 이로 인해 조선여자의학강습소, 동덕여고보, 중앙보육학교 등이 이전해 운영하다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였음. 현재는 배성여자상업고교만이 남아 있음.

 ❍ 성곽밖 마을인 창신동에서 거주하거나 노동자로 살았던 여성들은 하층민에 가까웠음. 특히 해방 이후 1950~60년대 창신동에 등장한 사창가로 인해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거주했으며, 1960년대를 지나면서 박정희 정부에 의한 ‘윤락 행위 금지’로 인해 사창가가 철거되었으며 봉제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하였음. 이 러한 과정을 통해 창신동은 봉제공장을 중심으로 재구조화되었음.

 ❍ 지금까지 창신동은 봉제공장을 중심으로 사회적, 학술적으로 조명되어왔다는 점에서 창신동이라는 지역의 역사에서 해방 이후의 시기, 특히 1970년대 이후 특히 2000년대 이후 시기가 조명되어왔음. 1960~70년대에 대한 관심은 나이 어 린 여성노동력의 착취와 활용에 집중되었다면, 2000년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여 성노동력의 고령화로 인한 봉제업의 미래를 우려하는 논의를 중심으로 전개되 었음.

 ❍ 2000년대 이후 기술력을 축적한 숙련된 여성봉제노동자가 한국의 의류산업에서 갖는 역할을 조명하고 산업화 시기와 비교해 논의할 필요가 있음.

 ❍ 창신동과 여성의 관계를 중심으로 창신동의 장소성에 대한 역사화 과정에서 여성봉제노동자의 노동과 삶을 주목하는 것은 여성의 노동을 중심으로 창신동의 장소성을 주목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짐.

 ❍ 그러나 봉제공장과 여성의 봉제노동에만 초점을 둘 경우 창신동의 특정한 시기 혹은 특정한 노동에 한정해 창신동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하는 결과를 낳을 우 려가 있음. 또한 서울시에 의한 도시재생사업이 창신동을 방문하는 시민을 위 한 관광지로 전개되는 현 상황을 문제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음. - 김지윤(2105)은 “‘박물관화’ 되는 문화적 재현물로서의 ‘봉제마을’조성이 아닌 지역주민들의 일상과 사회경제적 활동의 기반이 되는 장소로서의 지역재생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음.

  - 따라서 창신동에서 봉제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노동에 관한 주목과 관심이 현 재 창신동이 갖는 봉제업의 위기는 물론 창신동 마을이 지역민의 삶과 노동 의 터전으로서 갖는 위기와 어떠한 관계 속에서 놓여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보임.

 ❍ 그리고 해방 이전인 일제강점기에 창신동에는 조선여자의학강습소,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중앙보육학교 등 여성교육기관이 들어섰음. - 이러한 근대여성교육을 통해서 배출된 여성들의 역할 등을 주목하는 등 창신동이 근대여성교육에 있어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조명할 필요가 있음. 근대여성교육과 해방 이후 창신동의 여성봉제노동과 관계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도 주목할 필요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