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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여성의 역사를 읽고 미래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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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창신동과 여성의 역사 // 1. 창신동의 역사

관리자 2022-03-31 조회수 55

제3장. 창신동과 여성의 역사


 ❍ 여기서는 창신동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살펴본 뒤, 창신동과 여성의 관계를 역 사적으로 살펴보고자 함. 이는 창신동이 여성과 어떠한 역사적 관계를 구성해 왔는지를 밝힘으로써, 봉제공장과 여성봉제노동자의 관계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임. 


1. 창신동(昌信洞)의 역사

 ❍ 창신동 지명의 변천 - 창신동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속한 동으로, 동의 이름은 조선시대 이 곳의 지명인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지어짐.

  - 1914년 동명 개정 때 제정되었으며 1936년 경성부 창신정으로 변경됨. 1943년 동대문구에 편입되었으며 1946년에 창신동이 되었음. 1975년 종로구 관할에 편입됨.

  - 법정동인 창신동은 행정동인 창신 1, 2, 3동으로 이루어짐.


<그림 1> 종로구 창신동 (네이버 지도)


❍ 조선 시대 동대문 밖 성곽마을의 형성

  - 창신동은 동대문 밖 성곽마을로 낙산자락에 위치했으며, 도성의 동쪽 대문인 흥인지문을 마주하고 있어 도성을 오가는 길목을 따라 조선 전기부터 사람들 이 모여 살았음.

  - 성내에 진입하지 못하는 중산층이 주로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궁녀 또는 궁궐 안에서 잡다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살기도 함.

  - 17세기에 지속된 흉년으로 농촌인구가 서울로 이동하면서 창신동 일대에 많은 인구가 집중되었음. 더욱이 조선 후기에는 성밖과 성안을 연결하는 동대문을 중심으로 육로가 발달함에 따라 인구가 밀집했음. 1899년에는 서대문-종로-동 대문-청량리 사이 단선 전차 궤도가 설치되면서 창신동에도 전차가 운행됨.

  - 이처럼 인구증가와 교통발달은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킴.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성저십리의 농민들은 도성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했으며, 현 동 대문 상권의 시초였던 배오개시장은 상업상의 요지로 성장함. 1905년 설립된 예지동의 광장주식회사가 포복 부분의 국내 최고 상가로 번창하면서 성밖 주 거지인 숭신방과 안창방 등에 인구증가와 더불어 서민주거공간이 확대됨.


❍ 식민지 시대 경성의 도시화와 서민 거주지의 형성

  - 일제 강점기 주거지 확대는 지속되어 성내에 살 수 없던 많은 사람들이 거주 하였음. 대부분 조선인으로 구성된 창신동 지역 주민은 농촌을 떠나온 농민과 경성 시내에서 밀려난 사람들로 구성됨. 대다수 주민은 도시 빈민과 같은 성 격을 띰. 창신동은 당시 이촌동, 현저동, 광희정 등과 함께 경성부의 대표적인 빈민지역이었음.   - 창신동의 조선인 가구는 1,534세대로 경성부에서 도화동, 현저동에 이어 세 번 째로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었음. 일본인이 도심을 차지함에 따라 도성 밖으로 밀려난 조선인들이 변두리에 몰려 살면서 나타난 현상임. 특히 이농민과 빈민 이 성벽 밑에 거주하는 토막촌이 발생함.

  - 가옥신축과 도시형 한옥의 등장 : 1930년대 중반 대형필지가 정형화된 작은 필지로 분화되었음. 1932년 동대문에서 출발해 뚝섬까지 이르는 기동차궤도가 신설되면서 흥인지문 주변에 새로운 블록과 도로가 형성되는 등 도시조직이 크게 변화함. 특히 일제가 대형건축물을 짓기 위해 1924년 창신동의 돌산을 경성부 직영의 채석장으로 만들었으며 이는 1960년대 초반까지 사용됨. 서민계층의 신축가옥(도시형한옥)이 대량으로 창신동에 공급되기도 함.

 - 가내공업 및 제조업 토대의 형성 : 창신동은 기능적으로는 도시적 생활권 속 에서 상업과 소규모 공업이 발전했음. 경성부의 도시화 과정에서 전차 및 궤동차 노선 신설, 방직공업의 선호, 동대문 및 종로 일대의 제조업 발달 등으 로 창신동 일대에도 가내공업 및 제조업의 토대가 형성되었음. - 1930년대에는 화재, 채석장 낙석사고 발생, 강도, 살인 등으로 치안이 불안했음. 


❍ 해방 이후 불량주택의 철거와 근대식 주거형태 도입

  - 판잣집 난립과 불량주택 양산 : 한국전쟁 이후 급격한 인구증가로 창신동 전 체에 불량주택이 확산되었음. 피난민들이 판잣집을 짓기 시작했으며, 저소득 노동자들의 대표적인 촌락이 되었음. 청계천 복개와 가옥 신축 등으로 도시재 건이 빠르게 이루어짐.

  - 불량주택의 철거와 근대식 주거형태의 도입 : 1960년대에는 불량주택을 철거 하고 개량사업을 실시했으며 근대식 주거형태가 도입되기 시작했음. 1962년에 는 도로 확장으로 창신동 일대의 판잣집이 사라지기도 했음. 채석장 자리에 점유된 무허가 건물은 철거되었으며 1962년에 창신시영아파트 3개동을 준공 했음. 그리고 1969년에는 창신동쪽 낙산지구에 시민아파트 30동이 건설되었 음. 1998년 낙산아파트는 철거되고 낙산공원화사업이 전개되었음. 1969년 청 계천의 전구간이 복개되고 청계고가도로가 준공되었으며, 1970년 창신3동 산6 번지 일대의 판잣집이 헐리고 시민아파트가 들어서고 철거민은 광주대단지로 이주시켰음.

- 동대문 시장의 발전과 노동자 거주지의 형성 : 창신동에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의류산업이 발전하면서 봉제노동자들의 거주지가 형성되었음. 창신동 인근 청 계천변에는 1950년대부터 의류도매업체가 자리잡고 있었음. 1955년 당시 내수 의류의 60%가 청계천변에서 생산되었음. 1961년 평화시장이 세워진 이래 봉 제공장은 청계천 일대 건물에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 전체 기성복 물량의 70%를 소화할 만큼 번창했음. 창신동은 평화시장에서 발전한 의 류봉제공장들이 확산되면서 동대문 의류시장의 일부로 기능하기 시작했음. 여 기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은 상가 사업장에 설치된 다락방에서 지내거나 창 신동의 저소득층 주거지에 거주했음. 당시 봉제공장의 열악한 환경으로 1970 년대에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음. 이외에도 창신동 일대에는 사창가와 쪽방촌 등 도시빈민의 삶을 보여주는 공간이 형성되었음. 1950년대 후반부터 창신동 에 사창가가 자리잡기 시작했음. 창신동 430-470번지 일대의 기동 열차 궤도 변의 판잣집을 중심으로 사창가가 밀집하기 시작해서 1970년대 후반까지 유지되었음. 1961년 윤락행위금지로 사창가는 점차 사라지고 도심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하층노동자들이 주거공간으로 사용하여 쪽방촌이 형성되었음. 산업 화 초기 지방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이 기거하는 창신동 근로회관(1961년), 동대 문 근로자합숙소(1962년)의 일부가 남아 쪽방으로 개조되기도 했음. 특히 1960 년대 창신동은 쓰레기, 오물로 인해 전염병 위험지대, 창신동 대화재, 저지대 물난리, 창신초등학교 초과밀학교 논란 등이 있었음. 


❍ 1970년대 이후 동대문 의류패션 산업의 배후생산지 형성

 - 주거지 정비사업과 다세대 다가구주택의 확산 : 1970년대 강북인구집중 억제 정책의 실시로 강북의 유서깊은 교육시설이 대부분 강남으로 이전하여 강남 개발을 촉진했음. 불량주택재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1986년에는 한성여대 부 근의 창신1구역에 쌍용아파트가 건립되었음. 그러나 재개발사업이 지연되면서 정비지구 해제 민원을 받아 일부 사업구역은 재개발구역을 해제하고 주거환 경개선사업지구로 변경하였음. 창신동 일대 일부는 아파트가 건축되었으나 대 부분 다세대·다가구주택이 등장하여 혼재된 주거지 모습을 띠었음. 특히 다 세대·다가구주택의 지하 혹은 저층부에는 동대문에서 봉제공장이 옮겨와 입 주하기 시작함.

  - 동대문의류산업클러스터의 배후생산지 형성 : 1970년대 이후 1980년대 말까지 의류생산공장들이 창신동 주거지역에 집적하면서 숙련노동력이 축적되었음. 1970년대는 내수시장의 확대와 의류수출 급증으로 의류산업이 한창 성장국면 에 있었음. 1971년부터 1977년까지 고속버스터미널이 입지해 동대문지역 도매 상가의 성장 동기로 작용함. 1970년 당시 최소 550개 이상의 공장과 2만 명이 상의 노동자들이 평화시장 일대에 밀집해있었으며, 생산 공정은 한 공장 내에 서 모두 이루어졌음.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기성복 시장의 주도권을 대기업 에 뺏기고 노조활동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면서 청계 천 일대의 공장이 창신동 및 신당동 인근 주거지로 흩어졌음. 수출중심이던 대기업이 내수시장에 진출을 확대하면서 평화시장의 판매가 줄어들었음. 이에 동대문의 상가 공장은 주변 주택가로 분산되고 하청관계가 확산되었음. 1980 년대 이전에 동대문시장에 밀접한 공장들이 창신동 등의 주택가에 분산되었 음. 창신동은 1960년대부터 청계천 일대를 중심으로 의류상가 및 공장들이 입 지한 까닭에 축적된 숙련된 노동시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원료를 공급받아 다 음날 납품하는 장소적 이점을 갖고 있었음. 평화시장 인근에 위치한 창신동은 지방 출신의 노동자가 거주하는 자취지역이자 일시적으로 급등한 수요를 위 한 물량을 소화하는 영세하청업체지역으로 기능함. 결국 평화시장 등 동대문 일대 의류생산공장은 창신동과 신당동 등지로 확대되었으며, 동대문 의류패션 산업의 배후생산지로서 보조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거주지 역할을 담당했음.

  - 동·남쪽의 청계천변은 무허가 판잣집이 난립한 지역이었으나 196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대부분 철거되고, 지금은 동대문 상권과 더불어 번화한 상가지역 으로 됨. 전태일 분신 이후 평화시장 봉제공장들이 창신동으로 대개 이전하였 음. 이전에는 3천개에서 많게는 6천개 가량의 크고 작은 공장들이 모여 있음. 1970년대 서울 동대문 일대의 봉제산업은 한국 경제의 근간이었음.


❍ 1990년대~2000년대 상권 변화 및 개발 사업에 따른 도시구조 재편

  - 생산업 침체와 봉제공장의 쇠퇴 : 1990년대 이전까지 평화시장 상가 공장은 창신동을 비롯한 주변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작업장이 분화되어 생산 공정별 로 각기 다른 사업장으로 분리되는 형태가 나타남. 공장은 가내수공업의 소규 모 형태로 운영됨. 1990년대 중반 대기업의 내수시장 진출로 의류봉제산업이 침체되고 공정별로 작업장이 분화되면서 사업체의 규모가 영세업체 위주로 재편됨. 1990년대 이후 의류생산 공장은 창신동을 포함한 동대문 시장권역에 서 서울시 북부와 동부의 인접권역으로 이동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대문 상 권을 뒷받침하는 생산공장은 창신동을 비롯한 동대문 일대에서 집적도가 매 우 높은 편임. 따라서 동대문 의류산업 배후생산지로서 창신동의 위상이 여전 히 매우 높음. 1990년대 말에는 밀리오레, 두산타워 등 현대식 대형의류상가 가 들어서면서 동대문시장은 쇼핑상권으로 재활성화시기를 맞이함. 2000년대 들어 서울시는 동대문 일대 재정비를 실시함. 이는 생산중심의 기존 도매상권 에 타격을 줬으며, 청계천 복원 등 청계천 주변지역에 개발압력이 높아지면서 창신동은 정비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음.

  - 개발사업의 촉진과 도시개발 패러다임의 변화 : 2000년대 창신동 일대에는 대 형의 민간개발사업은 전개되지 않았음. 창신동 주변 개발압력이 커지면서 2007년 뉴타운사업으로 종로구 창신 1~3동, 숭인1동 일대는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되었으나 사업추진이 지연되었음. 2013년 10월에는 뉴타운 지정이 해제되 고 박원순 서울시장 취임 이후 첫 번째 도시재생 사업지로 선정되었음.


❍ 2020년 현재의 창신동

  - 2015년에 서울시는 창신동 일대를 도시재생뉴딜 사업 대상지로 정하고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한 사업을 실시하였음. 그러나 이 사업은 철거나 이주없이 기 존의 모습을 보존하며 지역을 활성화하는 것이었음. 2014년 지정된 ‘전국1호 도시재생사업지구’로, 주거지역 환경개선에 900억이 투입되었으며 정부와 서울시는 성공적인 도시재생으로 자평하고 있으나 창신동 지역주민의 반응은 다름. 지역민 등을 비롯한 봉제공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도새재생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데, 지역민을 위한 사업이 아닌 창신동을 방문하는 사람을 위한 ‘지역 명소화 사업’으로 전개되었다고 지적함. 현재 지역민들은 공공재개발을 희망하고 있으나 도시재생개발지는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임. 한편 창신동 일대의 쪽방촌에는 저임금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봉제공장에서 부족한 인력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어 근무하고 있음.

  - 창신동에 새롭게 등장한 주요한 볼거리는 도시재생사업에 의해 구성된 측면이 있음. 대표적으로 동대문 성곽공원, 백남준 기념관,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창신동 봉제거리 박물관 등이 있음. 창신숭인도시재생센터에서는 지역주민으 로 구성된 마을해설사 등이 안내하는 답사프로그램인 ‘창신숭인’ 도시재생 투 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함.

  - 이외에도 창신동이 2000년대 이후 청년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면서 지역과의 호흡을 바탕으로 사업을 하는 사회적 기업 등이 정착하기도 함. 대표적인 사 례로 사회적 기업 공공공간과 디자이너·봉제사가 공존하는 ‘창신아지트’ 등이 있음.


❍ 창신동 관련 영상

  - 창신동 관련 텔레비전 방송은 주로 창신동이 도시재생사업지로 선정된 이후 제작되었음. 기존의 봉제노동자와는 다른 성격과 활동을 바탕으로 창신동에 정착한 청년세대들을 포함하기도 함.

  - 이러한 대중적 접근들은 창신동 봉제공장에서 이뤄지는 작업과 동대문 시장과 의 관계와 역할에 초점을 두고 있음. 도시재생사업이 전개되고 있는 만큼, 창 신동에서 진행되는 봉제업의 현재를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역사화 작업이 수 반되고 있음. 그러나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의류산업에서 현재적 역할을 부각하 며 봉제업을 낭만화하거나 창신동의 낙후되고 영세한 규모의 봉제업이 갖는 위기를 문제화하기도 함. 

  - KBS 다큐멘터리 3일(490회) 2017년 3월 5일 : <‘재개발'이 아닌 '재생'을 선택한 창신동 사람들의 72시간>, <오래된 돌산, 재생마을이 되다!>, <창신동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창신동 속 청년들, 꿈을 키우다> - KBS 김영철의 동네한바퀴 2019년 3월 9일 : [성곽 아래 돌산마을 - 서울 창 신동, 이화동] (프로그램 안내) 낙산자락 언덕에 포근히 안겨있는 동네. 1970~80년대 우리나라의 패션 산업을 선도했던 봉제공장들이 모여 있는 창신 동, 곳곳에 자리 잡은 마을 박물관들과 아이디어 상점들로 젊은이들의 취향을 사로잡은 이화동이 있다. 쉼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창신동과 옛 모습들을 고 요히 품고 있는 동네 이화동에서 열여섯 번째 여정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