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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창신동의 봉제공장과 여성의 봉제노동 //4. 창신동 봉제여성노동자의 기존 인터뷰 자료 분석

관리자 2022-04-07 조회수 38

4. 창신동 봉제여성노동자의 기존 인터뷰 자료 분석




  ❍  창신동 봉제여성노동자의 인터뷰나 구술사 채록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바 없음


  ❍ 기존의 문헌자료에 실린 인터뷰를 활용하여 창신동의 봉제공장에서 전개된 여성의 노동을 분석하고자 함.

  - 창신동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목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이며, 서울시가 창신동에서 도시재생사업을 실시하면서 대중적으로 다뤄진 경향이 있음.

  - 엄상빈의 창신동 이야기: 재봉틀 따라 함께 돈 한평생(2011)에 실린 인터뷰자료를 주로 분석하였으며, 이외에도 서울역사박물관의 창신동 : 공간과 일상(2015)에 실린 창신동 및 봉제업 관련 여성들의 인터뷰 등을 분석하였음.

  - 이러한 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여성봉제노동자의 성장과정과 의류봉제업 진출 계기와 과정, 봉제노동과 기술숙련, 봉제업 작업장의 특징, 결혼 및 자녀양육과 봉제업 재진출 계기, 현재 창신동에서의 삶과 노동 그리고 일상생활 등을 중심으로 살펴봄.

  - 기존의 인터뷰 자료는 분량이 길지 않고 대략적인 질문으로 전개된 특징이 있지만, 창신동 여성봉제노동자의 봉제노동, 창신동에서의 삶 그리고 생애 등에 관한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임.


  ❍ 여성봉제노동자의 성장 과정과 의류봉제업으로 진출한 계기

  - “봉제일을 하고 있던 옆집 자매가 추석 때 내려왔다가 올라갈 때 따라온 거지요 : 지역에서 지내다가 언니가 봉제업에 진출한 뒤 언니를 따라서 동생도 봉제업에 진출하거나 봉제공장에 취업한 옆집 언니들을 따라서 상경하여 봉제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음. 상경하는 나이도 언니가 상경한 나이와 비슷한 편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봉제업에 진출한 경우가 많음. 즉 여성들이 봉제업에 진출하는 과정에는 친언니, 동네언니, 친척언니 등 봉제업에 종사하고 있는 가까운 친인척과 이웃의 소개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음.

  - 때로는 가족이 모두 서울로 상경해서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음. 가족경영의 방식으로 가족이 모두 봉제업을 하는 경우 집에 공장을 차리고 집에서 제품 생산과 납품 하는 등 역할을 나눠서 일함. 당시 가족을 구성하는 자녀들 수는 적게는 3~4명에서 많게는 8~9명이었음. 이처럼 대가족이 일반적이었던 1960~1970년대는 한 명이라도 빨리 취직해서 자립하는 것이 중요하였음.

  - “시험을 쳐서 남원여고에 합격했는데 죽어도 안보내줘요. 그래서 울산 간 거지요. 큰 딸은 동생들의 영원한 희생양이다 그거지요. 아버지가 막내다 보니 재산도 없이... 이해는 가요. 아버지는 남동생 대학 보내야 된다는 일념이었지요.” : 봉제업에 진출해 시다를 하며 기술을 익히기 시작함. 상경 당시 부모가 반대하는 경우도 있고, 진학의 좌절로 집을 일부러 떠나는 경우 등도 있음. 그러나 언니나 주변의 여성들이 초등학교 등 일정한 교육을 마치고 봉제업에 취업해 돈을 버는 것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봉제업에 쉽게 진출한 것으로 보임. 이로써, ‘봉제업의 여성화가 자연스럽게 전개됨.

  - 1960~1970년대 여성들에게 상급 학교 진학은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가난으로 인해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여건에 놓였음. 빈곤이나 성차별이 진학의 좌절로 나타났음. 그러나 가계부양의 동기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음. 농촌 출신의 경우 빈곤탈출과 성차별, 진학 좌절은 대도시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남. 10대의 여성들이 노동자가 된 데는 가난한 가정 형편과 여성이기 때문에 진학 좌절 경험과 탈농에의 의지 등이 동기로 작용한 것으로 보임(김귀옥, 2004: 235~236).

  - 대기업에 입사한 여성들은 학원이나 훈련 과정없이 취업을 계기로 양성공이 되어 의류봉제기술을 익혔음(김귀옥, 2004: 237). 또한 대기업의 의류제조업에서 근무하는 여성들은 규율과 시간 엄수가 엄격했음(김귀옥, 2004: 238).

  - 지방에서 거주하다가 1970년대 10대 혹은 20대에 상경하여 평화시장에 위치한 봉제공장에서 시다로 근무하였음.

  - 고등학교에 합격했으나 부모가 딸의 진학에 지원을 하지 않아 집을 떠나기 위해서 봉제업에 취업하기도 함.


  ❍ 봉제업에서 전개된 노동의 내용과 기술 숙련도 관련

  - 상경해서 기숙사에서 지내기도 했지만 기숙사의 여건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었음. 야간학교는 일이 많아서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있었으며, 시다로 근무하면서 남자들의 양말을 빠는 등 각종 보조업무까지 해야만 한 경우도 있었음.

  - 과거에는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고 12개월을 못 채우게 하기도 하였음.

  - 1960~70년대 의류봉제업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봉제기술임. 일제 강점기부터 전통적인 섬유의류봉제업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음. 즉 좁은 작업장에서 모든 공정을 다 작업할 수 있는 완전숙련노동, 즉 장인노동에 의한 의류봉제가 해방 후에도 계속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함(김귀옥, 2005: 44~45).

  - 대기업인 반도상사의 경우 :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이 되면 대공장이나 중간 규모의 공장도 테일러리즘에 기초한 라인별 부분노동 방식이 도입되면서 숙련공 개념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함. 영세한 청계피복공장의 경우에도 1970년대 후반이면 대개 라인별로 작업을 진행하였음(김귀옥, 2004: 239). 단순노동에 대한 권태를 느낌. 한 라인의 속도를 준수하고 상호 호흡을 맞춰나가야 하는 라인식 공정 체계를 익혀나가며 조직노동자 혹은 부분노동자로 변해감. 이는 결과적으로 노동력을 일정하게 균일화시키는 과정임(김귀옥, 2004: 241~243). 그리고 1980년대 이래로는 노동력이 완전 포섭되어 전 공정을 망라할 수 있는 사람, 즉 숙련노동자가 별로 남지 않음(김경옥, 2004: 245).

  -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중반까지 의류봉제업의 많은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은 일정한 단계에서 숙련공이 되면 대체로 완전숙련노동에 해당하는 장인노동을 많이 하였음. 그러나 1970년대 중후반을 전환점으로 하여 노동자들은 작업장의 공간적 구조가 변화됨에 따라 탈숙련 과정을 거치게 됨. 즉 당시 노동자의 기술은 자본에 의해 완전 포섭 당함에 따라 탈숙련화되어감(김귀옥, 2005: 25).

  - 의류봉제공장에서 기성복은 여성은 미싱, 남성은 재단으로 성별분업노동으로 전개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맞춤복에서는 여성이 재단사, 패턴사가 있었음(김귀옥, 2005: 50). 특히 반도상사의 구술자 중 미싱사 출신들은 누구도 자신이 재단사가 될 수 있다거나 재단사가 되려하지 않았음.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자였던 신순애에 따르면, 1960~70년대를 통틀어 600여개의 평화시장 내 공장 가운데 여성 재단사는 단 한명이었다고 함(김귀옥, 2005: 50).

  - 재봉기술은 사실상 조립하는 실행능력이라면 재단기술과 지식은 일종의 구상에 해당하는 작업임. 오랫동안 산업기술은 자본의 지배일 뿐만 아니라 남성 권력을 반영해왔음. 따라서 구상으로서의 재단기술과 지식을 남성이 독점했다는 것은 단순한 기술상의 분업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남성 중심적 지배전략의 실천을 의미함. 따라서 1960~70년대 노동자를 통해서 본 반도상사 작업장은 여성화되어 있는 공간이지만 남성기술이 지배하는 공간이었음(김귀옥, 2005: 51).

  - 10대에 봉제일을 시작한 여성 중 재단 기술을 배운 경우는 한 명 정도로, 봉제기술 이상의 기술을 배우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임


  ❍ 봉제업 작업장이 갖는 성격과 특징

  -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친밀한 관계(계모임도 함께 참여, 일감 소개 등)를 맺음으로써, 같은 공장을 다니다가 그만둔 뒤에도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는 등 관계를 유지함. 여성들이 결혼 후에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남편의 인정이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데, 같은 성씨를 가진 남편으로 친하게 지내는 경우도 있었음. 이는 남편이 아내가 만나는 여성과의 관계가 필요한 데, 이때 남편들끼리의 친분이나 안면이 있는 경우 여성들의 관계 유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임. 세월이 흘러서 다시 봉제업을 하는 경우에 과거에 함께 일 했던 친구를 찾아가 같은 공장에서 일하기도 함. 그만큼 과거 평화시장의 봉제공장에서 함께 인한 관계가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기도 하였음.

여성들이 근무하는 대기업의 작업장은 상품을 생산하는 곳이지만, 노조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작업장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서로 단결하는 장으로 변모하기도 함. 그리고 폐쇄적 공간이었던 작업장은 노동자들이 교류와 단결을 하면서 열린 작업장의 시대로 전환되기도 함. 이로 인해 위계서열적인 통제가 가능하지 않게 되기도 함(김귀옥, 2005:31~44) 즉 열린 공간이자 노동자 자신을 의식화시키는 새로운 학교이며, 소외된 노동을 극복하는 가능성을 담은 공간 혹은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공간으로 변해갔음(김귀옥: 2005: 52).

대기업의 경우 노조운동이 활성화 되면서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아가지만, 큰 틀에서 보면 국가지배 이데올로기, 노사협조주의 이데올로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기술적 통제전략 등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임(김귀옥, 2005: 53).

작업장에서 산업화 시기에는 다락이 있고 여기에 시다나 미싱사들이 일을 했지만 현재 창신동에는 필요에 따라 남성이 다락에서 재단을 하고   - 여성들이 아래에서 재봉을 하는 등 작업장에서 일하는 장소가 변화되기도 하였음.


  ❍ 봉제여성노동자의 결혼 및 자녀양육과 봉제업 재진출 계기

  - 같은 공장에서 근무하는 남자를 만나거나 친척의 소개를 받아서 결혼하기도 함. 동거를 하다가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음. 계를 해서 돈을 모아 살림집을 장만하기도 함.

  - “나이 들면 여자들 힘이 더 세지잖아요? 파워요. 그래서 (남편과) 헤어진 거지요.” : 남편이 사업을 하거나 직장을 다녔으나 가정 살림에 보태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음. 지인에게 담보로 대출을 해줘서 살림이 어려워진 경우도 있거나 남편이 술을 하거나 주색이 있어서 가정에 충실하지 않아 이혼을 한 경우도 있음. 즉 남편이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음.

  - 남편에 의지해 살림과 자녀교육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자신이 직접 돈을 벌어 자녀교육을 시킴. 혹은 남편과 다른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다시 봉제업으로 돌아오기도 함. 봉제업의 변화가 커서 공장을 차렸다가 그만두고 취업을 했다가 다시 공장을 내는 등 변화가 있는 편이었음.

  - 늦은 밤까지 일해서 자녀들 교육을 시킴. (야간 근무)에 객공으로 일해서 자녀를 돌보며 일을 하기도 했음. 그러나 일 하는 동안 자녀들은 친정어머니나 시부모가 돌봐주었음.

  - 부부가 함께 공장을 운영하는 경우 공장의 이름은 자녀들 이름을 따는 경우가 많았음. 그리고 공장에 방이 딸린 곳을 작업장으로 고르기도 함.

  - 결혼을 하고 계속해서 봉제업을 하기 보다는 자녀 출산과 함께 그만두고 살림을 하거나 다른 일에 종사하다가 다시금 봉제업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음. 이는 숙련된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임.

  - “그래도 이건 기술이잖아요? 일을 다시 시작했지요. 미싱 한 대 놓고 집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 아이를 낳은 뒤 출근을 하면서 일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집에 기계를 들여놓고 가내하청을 하기도 함. 1990년대를 접어들면서 가내 하청이 증가한 것은 여성들이 자녀양육 때문에 자발적 선택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의류산업의 구조조정에 따른 위기로 봉제공장의 규모가 영세화되고 하청화되는 추세에 놓였기 때문임.

  - “그래도 이건 기술이잖아요?” “어떤 옷도 할 수 있어요” : 여성봉제기술자들의 봉제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편임. 창신동의 여성봉제노동자들은 20~30년 경력의 숙련된 봉제기술자임. 그러나 숙련된 우수한 기술을 가진 장인으로 사회적 인정이 부족한 상태이며, 공임비가 20~30년 전과 비슷하다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음.


  ❍ 현재 창신동에서의 봉제노동과 일상생활

  - “자매보다 더 가깝지요. 자매도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나요? (...) 같이 의지하고 같이 있으려고 정 때문에 왔어요 : 객공(봉제공장에서 한 장당 가격을 정해놓고 일한 만큼 받으며 일하는 방식) 형태로 일을 하거나 봉제공장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음. 일의 종류는 시야게(마무리 작업), 미싱, 검사 등을 하고 있음. 나이가 들어서는 돈도 중요하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를 중요하게 여겨 친하게 지내는 언니의 공장에 와서 적은 월급이지만 일하고 있는 경우가 있음. 중년 이후의 여성들은 자녀가 일정하게 성장하여 취업을 함에 따라, 때로는 돈 보다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작업장에서 근무하는 것을 선호하기도 함.

  -그래도 우린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다. 천 조각 하나만 있으면 입을 수 있는 것, 주워서 머리 끼우고 몸 가리는 건 다 만든다. 수십 년 기술 가진 장인, 예술가들 아닌가 : 어린 나이부터 시작된 고단한 육체노동과 결혼 후 남편이 가장 노릇을 제대로 못함에 따라 고생을 많이 했지만, 50~60대 나이에 지속적인 노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행복하고 감사함을 느낌. 이는 여성들이 기술 기반의 노동을 통한 경제적 자립함으로써 갖게 되는 자부심으로 보임.

  - 봉제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여기는 여성봉제노동자들은 여자들로서는 떳떳하고 수입도 남자들 버는 것 보다 나아요라고 대답함. 이는 여성들이 일을 해서 남성만큼 혹은 남성보다 더 벌 수 있는 직업으로 봉제노동을 인식하고 있음.

  - 수당이 있지 않고 만든 개수만큼 벌기 때문에 수익을 늘리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았음. 공임비가 지난 30년 동안 거의 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정한 수익을 얻기 위해 늦은 밤까지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음. 그리고 7~8월과 1월은 비수기라 공장 운영이 제대로 안됨. 창신동은 봉제공장이 많아서 밤늦게까지 작업이 가능하다고 함.

  - “이 일은 힘 떨어질 때까지 하잖아요? 일흔 넘은 분들도 잘 하세요.” : 60대를 넘어서는 일하기가 힘든 이유는 눈이 잘 보이지 않고 건강이 나빠지기 때문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제는 정년이 없는 직업이라고 여성봉제노동자들은 인식하고 있음.

  - 한편 부자재 가게를 운영하는 경우에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것으로 보임.

 - 창신동에 위치한 봉제공장은 사업자등록을 안하는 경우가 많은 편으로, 여성이 공장을 연 경우 규모가 작아 사업자등록을 하지 않고 운영할 가능성이 있음. 이러한 경우 공식적인 통계자료에서 누락될 가능성이 많음.

  - “언니들이 하나둘 결혼하고, 넷째 언니까지 결혼한 스물 여덟 살에 공장을 떠맡게 됐어요. 그 때 재단사를 썼는데 사람들이 너무 안맞는 거예요. 그래서 재단을 배웠지요. (...) 어느 땐가 남방을 했는데 히트를 쳤어요, “경기 탓도 있겠지만 보통 다른 공장처럼 신랑이 재단 같은 일을 하고 그러면 좋은데 여자가 혼자서 (공장 운영을) 하니까 힘들었어요. (...) 그래도 (기술을) 잘 배운 것 같아요. 남자들보다도 월급이 세니까 좋아요. 안 좋은 건 늦게 끝나는 거지요. 여성이 공정하겠다고 한다면, 말리기 보다는 지금이 힘든 때니까 판단을 잘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 산업화 시기 여성들은 주로 시다나 미싱사로 일했다면, 현재 창신동에는 여성들이 봉제를 담당하는 하청공장을 운영하는 공장주인 경우도 많음. 과거에 여성이 공장주였던 경우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창신동으로 이전하면서 공장의 규모가 작아지고 여성이 기술력을 축적하면서 여성공장주가 증가한 것으로 보임.

  - “남편 쓰러지면서 집 가까이 오겠다고 해서 이쪽으로 옸어요. 여기에 온 지 벌써 7~8년 돼요. 진짜 잘 해줘요. 사장님이 저를 친어머니같이 대해 주고, 저도 내 공장이다, 내 아들이다 하는 생각으로 해요 : 작업장의 분위기 역시 현재는 과거와 비교해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음. 산업화 시기 작업장은 폭압적이며 위계적인 분위기였다면 현재 창신동은 봉제공장의 작업장은 재단사와 미싱사 그리고 미싱 보조 등의 관계가 수직적이라기보다는 수평적이며 공동체적인 분위기가 훨씬 더 강화되었음. 이는 작업장에서 재봉을 하는 상당수의 봉제사들이 숙련된 기술을 가진 여성봉제노동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여겨짐. 또한 남편이 재단을 하고 아내가 미싱을 하는 역할분담 하에 공장을 운영하면서 지역 내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 오래 전부터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주로 채용해서 함께 근무하기 때문이기도 함. 더욱이 친밀한 관계의 유지가 공장이 지속적으로 지역에서 살아남는데 핵심이 되기 때문이기도 함. 따라서 가족같은 공장식구들”(서울역사박물관, 2011: 195)이라는 분위기를 갖고 있음.


  ❍ 제가 살고 있는 곳이 봉제 일이 많잖아요. 옷을 만드는 데는 옷 만드는 장인이 있고 기술자들의 이야기는 별로 없어요. 전태일씨, 너무 불쌍한 여공. 너무 열악한 작업환경 그런 것만 있는데, 굉장히 활발하고 뭔가 막 하고 싶고 굉장히 열심히 살고 있고. 끼가 많은 사람들. 그런 얘기를 좀 막 하고 싶어요.”창신동에서 봉제한다고 그러면 불쌍하게 바라보는데, 봉제도 훌륭한 기술이고 직업이다. 우리도 나름 열심히 일하고 재미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열악한 환경, 전태일 열사가 고생한...’ 그런 얘기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전태일씨 덕에 우리가 이만큼 사는 건 사실인데, 우리 그렇게 불쌍하고 안쓰라운 사람들 아니다 : 창신동의 여성봉제노동자들은 여공에 대한 지배적 담론에 대해서 반박을 하면서, 자신들은 숙련된 기술을 가진 장인이자 주체적인 행위성을 가진 여성주체임을 강조함. 이는 여성노동자를 동정이나 저소득층으로 복지적 시혜가 필요한 존재로 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음.




5. 소결

 

  ❍ 기존의 인터뷰에서 다뤄진 내용과 함께 추가적으로 주목해야 할 사항들은 다음과 같음.


  ❍ 창신동에서 전개된 봉제업과 여성노동을 주목하기 위해서는 가내노동 혹은 가내하청의 형태로 전개된 점은 물론 부부가 함께 공장이나    점포를 운영한 방식, 그리고 가족, 친구, 동료 등 다양한 관계의 여성들이 동료로 함께 운영한 방식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음.

  - 1960~70년대에 집중된 여성노동에 관한 연구는 주로 대기업과 완전공정이 이뤄진 봉제공장에서의 여성노동을 주목해왔음. 이로 인해, 여성의 공장노동이 미혼 여성, 혹은 10대의 어린 여성의 노동에 집중되었으며 여성노동자의 희생으로 국가의 경제성장이 이뤄진 측면이 집중적으로 부과되었음. 이는 산업화 시기 여성노동의 착취에 기반한 국가경제의 성장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 위한 맥락에서 전개된 측면이 있음.

  - 또한 대기업과 평화시장의 봉제공장에서 이뤄진 성별노동분리와 가부장적인 위계적인 방식이 창신동으로 이전된 뒤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는지 혹은 산업 구조와 여성의 생애주기 변화 속에서 이전과는 달라졌는지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음. 여성이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아닌 운영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남편 및 가족과의 관계에서 어떤 위치성을 가졌는지를 논의할 필요가 있음.

  - 현재는 물론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봉제업을 호황을 누리던 당시에도 남편이 공장을 운영하고 여성이 점포를 운영하거나, 가족이 모두 참여하여 가족경영을 하는 등 여성들은 시골에서 상경한 어린 나이의 미혼여성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도 봉제업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음. 봉제업의 하청화와 영세화가 전개되는 가운데 여성들이 숙련된 기술을 바탕으로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음.

  - 또한 봉제공장의 노동을 통해서 여성의 기술숙련의 전개와 기술숙련을 통한 자본의 확보나 사회적 지위 상승 등 여성봉제노동자가 직원에서 머물지 않고 공장의 운영자나 소유자 등 역할 변화가 어떻게 전개되어왔으며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조명할 필요가 있음. 궁극적으로 한국 의류산업의 역사적 변화 속에서 창신동의 여성봉제노동자의 노동의 성격과 그것의 변화를 조명할 필요가 있음.


  ❍ 더욱이 봉제업이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것에서 창신동을 비롯한 주변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규모가 더욱 영세해짐에 따라 여성노동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음.

  - 이러한 맥락에서, 확대된 가내하청을 주목할 필요가 있음. 가내하청을 하는 경우는 기술력을 가진 여성들이 결혼과 함께 출산과 살림으로 인해 출근을 하지 않고 집에서 노동이 가능한 가내하청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음.

  - 또한 결혼과 함께 가내하청을 했던 여성들이 자녀의 성장과 함께 노동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음.


  ❍ 기성복을 제작했던 창신동의 봉제업은 주로 미싱을 담당했던 여성들에게 어떠한 기술숙련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그것이 여성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의미화되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음.

  - 20~30년 넘게 봉제업에 종사한 여성들은 자신의 기술력을 자랑스러워하며, 기술이 있기 때문에 집에서도 가내하청이 가능함의 근거로 제시해왔음.

  - 그러나, 동대문시장에서 판매하는 의류는 저가의 제품들로 가격 측면에서 주로 우위를 갖는 제품을 생산해왔음. 이는 상품의 질 보다는 빠르게 생산할 수 있는 생산구조가 더 우위가 되었음. 이에, 여성의 기술은 우수한 제품을 만드는 것 보다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빠르게 만드는 것이 더 가치평가를 받아왔음. 이러한 점에서, 창신동에서 근무하는 여성에게 기술숙련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제품의 질과 속도라는 측면에서 좀 더 논의할 필요가 있음.

  - 더욱이, 창신동의 봉제업은 공장 마다 전문적으로 다루는 의류의 분야가 제한되어 있었음. 이 때문에 여성들은 특정 부문의 의류를 제작하는데 전문성을 갖게 되었다고 함. 이러한 방식으로 여성의 기술이 갖는 전문성이 갖는 의미를 분석할 필요가 있음.


  ❍ 이를 통해 산업화 시기 여성의 공장노동에 관한 연구에서 놓쳤던 지점과 산업 구조의 변화 속에서 창신동에서 전개된 봉제업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함. 따라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음.

  - 여성노동과 착취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은 물론 여성의 봉제기술의 내용(질 보다는 속도 우선)과 이러한 성격의 기술을 여성이 갖는 것의 의미, 현재 여성들이 가진 봉제기술의 의미. 숙련된 봉제기술은 작업장에서 여성의 독립적 자율적 위치를 보장하는 가의 여부 등을 다뤄야 함.

  - 여성이 노동자만이 아니라 운영자, 동업자 등 다양한 위치에서 전개된 노동 조건과 이로 인한 젠더관계의 변화 양상

 - 봉제기술은 여성의 성역할과 친밀하고 익숙하게 여겨왔다는 점에서, 여성적 기술이 갖는 젠더의 재생산과 여성의 영역의 제한이 갖는 영향과 그 효과

 - 창신동은 마을 전체가 봉제업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마을 단위의 동일한 업종에서 전개되는 여성노동자의 삶과 노동이 갖는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음.

  - 봉제공장은 수도권, 인천, 대구, 부산 등 주요 대도시,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반면에 양장점은 전국적으로 중소도시에 위치하였음. 이처럼 봉제업은 특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전개되는데 그것이 여성노동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를 논의할 필요가 있음.

  - 산업구조와 국가의 경제정책의 변화가 기성복 위주의 봉제업과 맞춤복 위주의 양장업에 어떠한 변화를 낳았는지를 다룰 필요가 있음. 산업의 구조적인 변화로 인한 여성의 노동과 사업이 커다란 영향을 받아왔던 지점이 무엇이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무엇(사회적 기업, 기술의 업그레이드 등)이 제시되고 있으며 그것이 갖는 한계점은 무엇인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음.



  ❍ 특히 비슷한 봉제기술을 익혔던 여성들이 기성복을 생산했던 봉제공장에서 근무한 여성들과 양장점에서 근무하거나 양장점을 운영했던 여성들 사이의 비슷한 점과 차이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음.

  - 봉제공장과 양장점에서 근무했던 여성들의 기술력과 자기 사업의 운영 방식

  -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양장점과 그렇지 않았던 봉제공장의 여성노동자의 노동과 기술을 구성하는 방식의 차이


  ❍ 1960-70년대 여성노동자들이 그 이후 어떻게 살아왔는지, 특히 그 이후에도 창신동과 같이 동대문시장 인근의 봉제공장에서 혹은 봉제업에서 종사하고 있는 여성들의 생애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음.

  - 부부가 공장을 함께 운영하는 경우, 상당수의 인터뷰가 남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므로, 여성이 남편과 함께 공장 운영을 하는 경험에 대한 충분히 자료 조사가 필요한 것으로 보임. 그리고 혼자서 공장을 운영하는 경우도 많음.

  - 봉제업이 1980~90년대를 지나면서 미혼여성에서 기혼여성의 노동의 전환된 지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음. 전환된 계기와 과정, 기혼여성의 노동조건과 환경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음.


  ❍ 이러한 질문들을 바탕으로 1970~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창신동의 봉제업에 종사한 여성들을 발굴하여 구술을 진행할 필요가 있음. 이와 함께, 비슷한 시기 양장점에서 근무하거나 운영했던 여성들의 구술을 통해 비교연구를 할 경우 더욱 그 내용이 드러날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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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엄상빈(2015), 51.

97) 엄상빈(2015), 122.

98) 완전숙련노동 또는 장인노동을 주로 하던 의류봉제방식 대신 분업에 기초하여 기계화, 자동화 기계에 의존하는 의류봉제업이 지배하게 됨. 따라서 장인 중심의 노동과정이 흐름식 공정체계의 노동과정으로 바뀌고 탈숙련이 심화됨(김귀옥, 2005: 45). 1970년대 반도상사와 같은 대기업과 청계피복공장과 같은 영세 중소기업들의 작업장에서 비동시적으로 진행됨. 반도상사의 의류봉제부는 처음부터 흐름식 노동과정으로 출발했음. 반면에 1950년대부터 영세규모의 공장이 결집된 평화시장 청계피복공장은 대개 재단사와 완전숙련노동을 갖춘 ‘A급 미싱사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음. 즉 장인노동 중심의 노동과정은 1970년대 중반을 계기로 하여 제품에 따라 비동시적으로 흐름식 노동과정으로 전환됨(김귀옥, 2005: 45)

99) 기성복을 생산했던 의류봉제업에서 여성은 미싱사, 남성은 재단사라는 성별분업을 토대로 1960~1970년대 성별분업체계가 강고했던 시기(김귀옥, 2005: 51)라고만 설명하기는 어려움. 동시기에 양장점에서는 여성이 재단사를 하고 여성이 미싱사를 하는 것 역시 상당히 일반적인 풍경이었기 때문임. 전후 의류봉제업이 기성복과 맞춤복으로 구분되는데, 이 때 기성복 위주의 산업 구조를 접근할 경우 이러한 모습이 두드러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음.

100) 2010KBS 방송 <다큐3: 서울 창신동 봉제공장 누나들을 만나다(2010.03.30. 방송)>, 20.

101) 엄상빈(2015), 53.

102) 엄상빈(2015), 123.

103) 엄상빈(2015), 32쪽.

104) 이진순의 열림 창신동 라디오, 동대문 그 여자김종임 : 전태일도 우리처럼 재미나게 살고 싶었겠죠”, 한겨레, 201389일자.

105) 엄상빈(2015), 38.

106) 엄상빈(2015), 56.

107) 엄상빈(2015), 155.

108) 엄상빈(2015), 159.

109) 창신동 여인네들 라디오에 도전하다”, Mediavop, 20121014일자.

https://www.youtube.com/watch?v=RUcfl3Xm3pw

110) 이진순의 열림 창신동 라디오, 동대문 그 여자김종임 : 전태일도 우리처럼 재미나게 살고 싶었겠죠”, 한겨레, 20138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