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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창신동의 봉제공장과 여성의 봉제노동 //3. 창신동의 봉제업과 여성봉제노동자의 역사적 변화

관리자 2022-04-07 조회수 40

3. 창신동의 봉제업과 여성봉제노동자의 역사적 변화

 


. 한국전쟁 이후부터 1970년 이전까지 : 봉제노동자의 주거지 역할

 

  ❍ 의류산업의 초기에는 의류를 생산하는 공장은 청계천에 위치한 상가에 밀집한 형태로 시작되었음(서울역사박물관, 2011: 56). 창신동은 겨울철 성수기 및 명절 등 일시적인 수요 급등에 따른 물량 소화를 위한 영세하청업체 지역으로 기능하였음(서울역사박물관, 2011: 63).


  ❍ 청계천을 중심으로 봉제업이 발전함에 따라, 봉제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인근에 위치한 창신동에서 거주하기 시작함. 동대문시장에 위치한 봉제공장에서 근무하는 여성노동자들은 2층에 설치된 다락방을 기숙사로 사용하거나 인접한 창신동 등의 저소득층 주거지에서 거주하기 시작했음(주은선, 1999).


  ❍ 당시 창신동 일대는 사창가와 쪽방촌 등 도시 하층민이 살아가는 공간이 주로 형성되어 있었음. 창신동은 동대문시장 등 도심상권과 가까워 일자리를 구하기 쉽고, 기동차역 시외버스터미널, 새벽 인력시장이 입지하고 있어 쪽방촌이 형성되기에 용이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임(서울역사박물관, 2011: 56). 산업화 초기에 지방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이 함께 기거하는 창신동 근로회관(1961), 동대문 근로자합숙소(1962)가 건립되었음(서울역사박물관, 2011: 56).


  ❍ 이 시기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은 대기업 위주의 수출정책이었기 때문에 소규모 영세공장이 위주였던 청계천은 국가의 지원에서 제외되어 영세한 규모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으며, 이러한 성격은 이 시기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특징임.


  ❍ 사진작가 홍순태는 1960년대에 창신동의 판잣집과 철거 현장을 촬영한 바 있음.


  ❍ 창신동은 평화시장에서 근무하는 여성들의 주거지이기도 하였음.


  ❍ 1968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는 창신동에 가난한 여성을 위한 건물인 양지회관을 설립하였음.


  ❍ 농촌에서 가족의 생계부양과 취업을 위해 도시로 이주한 미혼의 젊은 여성이 창신동 봉제업 노동력의 상당수를 차지했음.

 


. 1970년대 중후반부터~1980년대 중반까지: 동대문시장의 배후지로서 창신동의 호황기 (공정별로 분업화와 영세화 전개)


  ❍ 1970년대에는 의류수출 급증과 내수시장의 확대로 의류산업이 성장 국면에 있었음. 이 시기 가게와 공장이 결합된 형태였으며, 한 공장안에서 생산 공정의 거의 모든 과정이 이루어졌음(서울역사박물관, 2011: 63). 그리고 1970년 이후 1980년대 말까지 의류생산공장들이 창신동 주거지역에 집적하면서 자연스럽게 숙련노동력이 축적되었음.


  ❍ 그러나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으로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에 관한 관리감독이 확대되면서 청계천과 평화시장에 위치한 많은 봉제공장이 1970~80년대에 창신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음(한 나, 2017: 34).

  - 청계천 주위에 위치한 공장은 1970년대 860여개에, 노동자 수는 1만 명에 가까웠지만 1988년도에 이르러서는 공장수가 140개로, 그리고 1994년도에는 7개의 공장이 남을 만을 만큼 감소되었음(전명숙, 2000: 208).

  - 기성복 시장의 주도권을 대기업에 빼앗기고 노조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청계천 일대의 생산공장은 창신동과 신당동 등 인근 주거지로 흩어지기 시작했음(서울역사박물관, 2011: 63). 결국, 1990년대 이전까지 평화시장 상가의 공장은 인근 주택가로 집적을 완료했으며, 작업장이 분화되어 생산 공정별로 각각 다른 사업장으로 분리되는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함. 공정별로 작업장이 분화됨에 따라 사업체의 규모가 영세업체 위주로 재편되었음(서울역사박물관, 2011: 65).

  - 평화시장에서는 의류를 만드는 공정이 한 점포 안에서 모두 이루어졌음. 즉 점포는 자신의 공장을 갖고 원하는 제품을 생산하여 직접 판매했음. 2층에서 재단을 작업하여 3층으로 보내면 봉제와 마무리 작업을 거쳐 2층으로 완성된 상품을 내려 보낸 뒤 1층에 위치한 점포에서 판매를 하는 구조로 평화시장의 점포가 운영되었음.

  - 그러나 동대문시장에서 창신동으로 공장이 이전됨에 따라 장시간-노동집약적 동의 형태가 유지되는 등 열악한 노동환경이 정체되거나 더 후퇴되는 문제가 발생함. 공장의 이전으로 노동자의 연대감이 저하 및 와해되고 공장의 규모가 축소됨에 따라 의류제작이 공정별로 분화되어 월급을 받는 직원의 형태보다는 일감을 받아 집에서 하는 객공 형태의 노동 방식이 증가하였기 때문임. 더욱이 주택가로 들어온 공장은 사업자 등록을 하지 않는 비율이 훨씬 높아지는 등 노동조건과 환경이 전반적으로 열악해졌음(김지윤, 2015: 135~136).


  ❍ 창신동에는 가내공업 형태의 공장이 급속도로 확장되었으며, 1980년대 초반에는 노동자 20~40명의 중형 규모의 공장들이 창신동에 많이 자리잡았음(한 나, 2017: 35).

  - 창신동에서 재단은 창신동 진입부에 주로 위치하며, 재봉공장은 창신2동의 경사가 급해지기 시작하는 덕산파출소 위쪽에 분포하며, 창신동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함. 그리고 마무리 작업인 시아게는 동대문 시장과 접근성이 좋은 저지대에 위치함. 분업화된 방식으로 창신동의 봉제업 공장은 운영되고 있음(한 나, 2017: 39).


  ❍ 평화시장을 비롯한 동대문 상가에서 이뤄지던 봉제업이 창신동의 종합공장과 가내공장으로 흩어져 나오면서도 성별분업노동은 지속되었음. 남성 재단사들은 사장을 겸하면서 종합공장을 차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여성들은 가내 노동 형태로 종합공장의 하청을 받는 위치로 놓이게 되었음(한 나, 2017: 40)

  - 여성들이 가내봉제노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기술력이 뒷받침함. 창신동의 여성노동자들은 옷 한 벌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기계와 작업장을 갖고 있으며 숙련된 기술을 갖고 있음. 숙련된 기술력은 여성의 가내노동을 가능하게 함(한 나, 2017: 41).

  - 여성들이 가내노동의 형태로 (객공 형태의) 미싱노동을 하게 된 데는 여성이 생산노동은 물론 가사노동과 돌봄 등 가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기인됨. 이로써, 여성들은 가사노동과 가내봉제노동을 자율적으로 결합시키면서 시장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생산해냄. 이로 인해, 한 장소에서 이뤄지는 여성들의 노동이 무엇이 생산노동이고 무엇이 재생산노동인지 그 경계를 모호하게 함(한 나, 2017: 40).


  ❍ 창신동에 거주하며 봉제노동을 하는 여성들은 친목모임이나 이웃관계를 통해 일감을 소개받기도 함. 생산과 재생산노동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들의 기술력은 여성들이 가내미싱노동을 하게 하며, ‘생계책임형 가족 구성원으로서 집과 지역에 갇혀 사는물적 조건을 재생산함. 이러한 이들의 비가시성은 이들이 생산해내는 가치와 기술 숙련도에도 불구하고 시장논리에 따라 공임비가 오르지 않고 유지되는 요인이 되기도 함(한 나, 2017: 43).


  ❍ 창신동에 봉제공장이 급격하게 들어섬에 따라, 1970~1980년대 창신동은 인구가 초과밀화되고 봉제산업의 호황에 따라 동네상권도 활성화된 시기였음. 1974년과 1985년사이에 동대문역 1호선과 동대문운동장역 2,4호선이 차례로 개통됨에 따라 교통도 편리해졌기 때문임(한 나, 2017: 35).


  ❍ 이로 인해, 창신동은 1980년대에 24시간 북적였던 시기였음. 아침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일을 하는 봉제공장이 가장 많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주변의 식당, 미용실, 저축은행 등 동네상권도 활성화되었음. 창신동과 동대문 상가를 오가는 배달수단이 자전거에서 오토바이로 바뀐 것도 1980년대였던 만큼 1970~1980년대 창신동은 바쁘게 움직이는 지역이었음(한 나, 2017: 36).


  ❍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의류산업의 국제분업구조의 변화로 한국에 요청하던 주문이 동남아시아와 중국 등 한국보다 인건비가 저렴한 국가로 이동함에 따라, 창신동의 의류봉제업의 위기가 닥침. 더욱이 1980년대부터는 텔레비전의 보급률이 높아지는 등 대중문화가 번성함에 따라 디자인이 중시되기 시작함(한 나, 2017: 35).


  ❍ 1980년대 이후에는 여학생의 교육 정도가 높아짐에 따라서, 봉제공장에서 인력 수급의 문제가 발생함. 이와 함께, 봉제공장에는 결혼 전 어린 나이에 근무했던 여성들이 결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근무하는 경향이 많아짐.


  ❍ 결혼한 여성들은 창신동 봉제공장과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거나 창신동에 거주하면서 가내하청의 형태로 노동을 주로 함. 따라서 봉제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주거지는 주로 청계천과 동대문시장 근처가 되었음.


  ❍ 창신동 봉제업은 결혼한 여성들이 집에서 미싱 일을 하는 가내하청의 형태와 봉제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 형태로 전개되었음. 더욱이 이 시기부터 부부가 함께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방식이 증가하였음.

 


.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 봉제업의 침체기

 

  ❍ 시다의 역할을 대신하여 실을 자르는 컴퓨터 미싱이 도입되면서 부부 혹은 기혼여성이 자매들과 결합한 형태의 1~2인 영세 규모의 공장이 1990년대부터 확산되기 시작함(한 나, 2017: 36).


  ❍ 여성들이 동료 혹은 자매, 친인척 등과 함께 여성들끼리 공장을 운영하는 경우 역시 증가하였음.


  ❍ 10~20대에 봉제일을 시작했던 여성들은 결혼 이후 자녀를 키우고 살림을 하면서 계속해서 미싱일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음.


  ❍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동생 전순옥은 1980년대에 창신동에 개구장이 어린이집이라는 탁아소를 개원하고,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자녀들을 돌보았음.


  ❍ 1990년대까지는 상대적으로 일감이 많았으나 보세 의류를 생산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봉제인의 나이가 주로 20~30대였기 때문에 아동의 돌봄이 중요한 이슈였음. 이는 2000년대까지도 아동 돌봄이 가장 큰 고민이었음(한 나, 2017: 45).

 



. 199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패스트패션과 도시재생을 통한 창신동 변화

 

  ❍ 1990년대 말에는 동대문에 프레야타운(1996), 밀리오레(1998), 두산타워(1998) 등 현대식 대형 의류상가가 들어서면서 동대문시장은 도매와 소매를 아우르는 쇼핑상권으로 재활성화 시기를 맞이함(서울역사박물관, 2011: 66).


  ❍ 이러한 24시간 소매형 쇼핑몰의 등장으로 창신동 봉제노동의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는데, 바로 패스트 패션으로의 전환임. 이전에는 계절별로 하나의 샘플로 옷을 만들었고 삼개월 동안 몇 천 벌의 옷을 만드는 방식이었다면, 패스트 패션이 등장한 이후에는 샘플로 50~60벌 정도씩만 만들고 매번 샘플을 바꾸는 다품종 소량 생산 방식으로 전화되었음(한 나, 2017: 36~37). 결과적으로 의류를 생산하는 기간이 하루 단위로 정착되기 시작함. 다시 말해 디자인 주문을 받으면 24시간 안에 완성된 제품을 납품하는 방식, 원데이(one day) 생산체계방식으로 창신동의 봉제공장이 운영됨.


  ❍ 이 시기부터 동대문에 들어선 대형 의류상가의 하청을 받아 의류를 생산하는 수직적 하청구조가 확대되었음.

  - 창신동에서 의류가 제작되는 일반적인 과정(제작 공정별 분업화 및 하청화) : 완성된 디자인(동대문 디자이너)을 갖고 창신동의 봉제공장에 주문 패턴 제작(원형) 옷감에 패턴을 놓고 그림을 그리고 옷감을 자르는 재단 과정(커팅) 배달 재봉 완성품 배달 단추달기, 워싱, 다림질 및 포장 배달(납품)


  ❍ 한편 1990년대부터 창신동 인구가 급감하기 시작했는데, 대기업이 의류산업의 내수시장에 진출했으며 동대문 쇼핑몰에는 중국에서 저가로 제작된 옷이 유통되기 시작했음(한 나, 2017: 37)


  ❍ 1970~80년대부터 10~20대부터 봉제업에 종사했던 여성노동자들의 나이가 고령화되어 감에 따라, 인력문제는 더욱 심각해짐. 특히 가내노동 형태의 노동자가 가장 많고 생계를 위한 지역의존도가 높은 창신2동의 인구가 고령화되고 감소하고 있는 상황임(한 나, 2017: 43).


  ❍ 창신동 647번지에는 종합공장이 주로 위치해 있는데 20%정도가 사업자등록을 했지만, 일명 개미공장인 영세 가내공장은 사업자등록과 4대 보험이 등록되어 있지 않은 상태임(한 나, 2017: 44). 2011년 현재 창신동에는 3천여 개의 의류공장이 소재해있음. 창신동에 소재한 공장의 수는 정확한 수치나 규모, 분포정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임((서울역사박물관, 2011: 137).

  - 창신동 647번지는 여성복을, 42번지는 남성복을 주로 제작함.

봉제인력의 고령화로 인해 외국인이주노동자들이 진출하여 노동자로서 근무함. 현재 창신동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조선족을 포함하여 중국인, 베트남인, 네팔인, 필리핀인 등 다양한 편임(서울역사박물관, 2011: 218).


  ❍ 한편 창신동은 브랜드 아파트가 창신1동과 3동에 세워지고, 영세 가내공장이 많이 위치한 창신 2동의 공동화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음. 이로 인해 창신동은 공간에 따른 계층적 구분이 전개되고 있음. 현재 창신동은 계층적, 인종적으로 이질적인 모습을 띠고 있음(한 나, 2017: 37~38).


  ❍ 창신동의 노후화에 따른 도시재생사업이 전개됨에 따라, 의류산업의 새로운 분야에 청년 여성들이 진출하기 시작함. 2014년 서울시는 창신동에 도시재생지원센터를 개소하고 창신동의 낙후한 환경을 개선하고자 했음.


  ❍ 창신동을 구성하는 공장과 가게를 살펴보면, 공정별로 분업화된 공장(패턴사무실, 재단 작업장, 재봉작업장, 마도메 작업장, 시아게 작업장), 종합공장, 기타 지원 가게들(미싱기기 및 오토바이 수리점, 부자재 점포, 밥집 등)이 위치해있음(서울역사박물관, 2011: 108~117).


  ❍ 숙련된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이 집중되어 있지만 창신동의 봉제공장에서 생산되는 의류는 저가에 집중되어 있으며, 자체 브랜드 생산이 거의 없이 디자이너의 주문에 따른 단순 제조만을 납품하는 임가공의 비율이 85%에 이름(김지윤, 2015: 137).


  ❍ 전태일의 동생인 전순옥(1954년생)은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종로구 창신동에 봉제업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위해 2003년에 공부방과 자녀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상담소를 포함한 참여성노동복지터를 개설했음. 결혼하여 자녀를 키우는 30~40대 주부들을 위한 시설임. 전순옥이 대표를 맡고, 청계피복노조의 여성활동가 출신인 임금자, 신순애, 김한영 등이 참가해 만든 단체로, 사무실은 전태일기념사업회 건물에 들어섰음.

  - 2003년 참여성노동복지터 개소 당시 창신동 일대의 500여 사업장을 방문조사한 참여성노동복지터에 따르면, 지하 작업장에서 30~40대의 주부들이 하루 16시간씩 노동을 하는 실정이며, 가내영세사업장은 사업자등록조차 안된 곳이 상당할 수 일정도로 영세한 상황이었음. 여성노동자의 68%30~40대로 대개 근속연수는 15년 이상인 숙련공이었음. 이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노동으로 인한 자녀교육과 돌봄의 공백이라고 응답함. 창신동의 골목에는 장시간 노동하는 부모로 인해 방치된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음.

  - 전순옥은 이외에도, 여성봉제노동자가 주축이 되어 수다공방 패션쇼를 개최하였으며, 이후 사단법인 패션봉제아카데미로 규모를 확장하여 운영 중임. 수다공방에 참여했던 여성봉제노동자는 창신동의 봉제기술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드러냈는데, “시장 옷은 장수떼기(옷 한 장당 공임을 받는 것)라 막 밟는데, 여기선 꼼꼼하게 몇 년 입어도 좋은 옷을 만드는 법을 배우니까. 기술을 업그레이드 시켜서 정말 명품 한 번 만들어보자. 장인정신으로 일하자이거든이라고 밝힘. 이는 창신동이 생산성 위주로 의류를 생산해왔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음.

  - 이러한 점에서 참신나는옷(대표 전순옥)’은 장시간 저임금 근로자의 전형이었던 창신동의 봉제공장 미싱사들이 고급 옷을 만드는 전문가로 성장시키고자 함. 2008년에 문을 연 참신나는옷역시 전순옥이 대표가 되어 추진하는 사업으로, 노동친화적 봉제공장임. 여기서 일하는 미싱사들은 수다공방출신들임. 수다공방은 창신동의 봉제공장에서 숙련된 미싱사들에게 옷에 대한 전체적인 개념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의 장소임. 이에, 디자인 분석부터 재단, 봉제 마무리까지 옷 만들기의 전체적인 과정을 배우는 곳임.


  ❍ 이주여성노동자들이 봉제공장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부족한 인력을 충원해주고 있음.

  - 1999년에 창신동에는 외국인이주여성노동자의 집이 세워졌으며, 2001년에는 이주여성인권센터로 확대 개편되었음. 갈 곳이 없거나 상담이 필요한 외국인 이주여성들이 상담이 많았음.


  ❍ 2013년에는 창신동에서 일하는 봉제공장운영자와 봉제인들이 모여 서울의류·봉제협동조합(이사장 박귀성)을 설립하고, 종로구 창신2(창신길 39 2)에 사무실을 두었음. 서울시에서 처음으로 생긴 조합으로, 부서 중에는 여성부가 따로 포함되어 있음. 2013년 현재 조합원 수는 240명임.


  ❍ 현재 창신동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경력이 보통 20~30년이 된 숙련공이 많은 편임. 10대에 시다로 일하다가 이후 결혼을 하고 가정형편으로 계속 해서 일하는 경우가 많은 편임. 출산 후 자녀를 돌보면서 가내하청을 하는 경우가 많았음. 1980년대 호황기를 지난 후 숙련공이지만 한 달에 벌어들이는 수입은 예전보다 더 줄어들은 상황임. 이 때문에 열었던 공장도 폐업을 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하는 상황임. 이들 중에는 작은 공방을 열어 재봉기술을 가르치는 곳을 운영하기도 함.


  ❍ 현재 창신동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으로 봉제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인력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 여성들이 봉제업에 계속해서 일을 하기 어려운 데에는 자녀를 돌봐주거나 휴식시간에 쉴만한 휴게공간, 그리고 가사와 작업을 병행하기 어려워 그만두는 경우가 잦음.


  ❍ 창신동에는 서울시에서 실시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을 <이음피움봉제역사관>이 건립되어 20184월부터 문을 열고 운영되고 있음.


  ❍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젊은 청년들이 다양한 형태로 창신동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음. 그 중에 ㅇㅇㅇ간의 대표 신윤예도 그 중에 하나임. 그녀는 처음에 창신동 지역아동센터 미술교사로 오다가 버려지는 자투리 천을 줄이는 친환경의류를 만들기 시작했음.

 


. 창신동 봉제업의 역사적 변화가 갖는 의미

 

  ❍ 봉제업이라는 산업구조의 변화는 여성노동의 형식에 있어서 변화를 초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소규모의 영세한 봉제공장에서 시다와 미싱사로 근무했던 방식이 지배적이었음. 그러나 동대문 시장과 의류산업의 위기 속에서 숙련된 여성노동자는 공장이 아닌 집에서 가내하청 형태로 노동을 하거나 남편과 함께 혹은 동료 여성들과 함께 공장을 운영하는 변화가 나타나기도 했음.


  ❍ 현재 동대문 시장의 배후지 성격을 가진 창신동의 봉제공장은 주로 여성의류를 생산하며, 유행의 주기가 짧고 다품종 소생산을 하는 환경에 놓여있어 상품생산을 통한 수익은 계속해서 감소되고 있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음.


  ❍ 여성의 의류는 최신 유행과 여성의 취향에 따른 변화가 매우 큰 상품임. 이러한 여성 의류의 성격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디자인과 브랜드 등의 측면에서 차별화될 필요가 있음. 그러나 영세한 규모와 디자인에 민감하지 않았던 방식의 노동에 오랜 동안 노출되었기 때문에 변화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은 상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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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홍순태(2013), 홍순태 사진집: 오늘도 서울을 걷는다, 가현문화재단.

77) 수출중심이었던 대기업이 내수시장으로 진출을 확대함에 따라 평화시장의 판매량이 급감하였음. 저임금의 노동력 확보가 어려워짐에 따라 동대문 상가에 위치한 공장들이 주변의 주택가로 이전하고 1980년대 말부터 급속하게 수직적인 하청관계가 확산되기 시작함(서울역사박물, 2011: 63).

78) 청계노조는 1988에 합법화되었으며 1998년에 서울의류노조에 통합되었음.

79) 동대문 디자이너로부터 주문을 받은 원청업체는 마킹과 재단 등 재단 작업을 하고 재단감을 하청업체에 보내 봉제작업을 하도록 하며, 다시 완성된 옷을 재하청업체에 보내 다림질 등을 해서 마무리를 하여 도매업체에 보내는 방식으로 하게 됨. 이 과정에서 제품은 두 개의 하청업체를 경유하면서 제작됨(한구영·김경민, 2018, 160; 그림을 서술하였음).

80) 창신동 봉제장인들, ‘멋지게!’ 일냈다.” 프레시안20131227일자.

81) 참여성노동복지터 홈페이지: http://www.spark.or.kr/, 주소: 창신동 종로 537-10, 전화번호: 02)774-4010. 이 기관에서 설립 초기에 실시한 여성노동자 실태조사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사료됨. 2003년에 <종로구 창신지역 봉제공장 (500) 근로실태 조사연구>를 실시하였음.

82) 노동자들의 삶, 30년전과 똑같아.” 서울경제2003527일자.

83) 봉제공장 여성들 자녀 맡길 곳 마련/ 참터, 활동 시작”, 한국일보, 2003620일자.

84) 사단법인 패션봉제아카데미 홈페이지: http://www.kassa.kr

85) 세상 밖으로, 창신동 봉제사들의 워킹”, 한국일보, 20061116일자.

86) 교육노동에 복지 결합... 무조건 퍼주기식 탈피”, 서울신문, 200911일자.

87) 결혼 뒤 쫓겨난 이주여성 사회안전망 없어, 10돌 맞은 이주여성인권센터한국염 대표”, 한겨레신문, 2011127일자.

88) 서울의류·봉제협동조합 사무실 연락처: 02-745-0973.

89) “미싱 인생 35년... 엄마들 삶에 밴 ‘월급의 역사’”, 《경향신문》, 2018년 1월 17일자.

90) “김선숙씨의 창신동 재봉사 삶”, 《동아일보》, 2018년 4월 20일자.

91) 서울의류·봉제협동조합 사무실 연락처: 02-745-0973.

92) “인력난 해법 한 가지”, 《매일경제》, 2006년 9월 4일자.

93) 이움피움 봉제역사관 홈페이지: http://iumpium.com 아카이브 메뉴에는 봉제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들의 구술 영상이 업로드되어 있음.

94) http://000gan.com/ 95) “제로 웨이스트 라이프의 좋은 예 000간 신윤예 대표”, 《여성동아》, 2020년 3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