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여성의 역사를 읽고 미래를 연다
지나온 여성의 역사를 읽고 미래를 연다
박영숙
집필자: 신필식
(사진1) 박영숙 사진자료
(사진2) 박영숙 사진자료
1. 문헌연구 내용 요약
○ 일찍 겪은 가족적, 시대적 풍파 속에서 다져지다
문헌연구대상자 박영숙은 1932년 5월 28일 평양에서 3남 3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 일찍 신문물을 받아들인 딸과 아들을 평등하게 대해주신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엔지니어였던 아버지가 가솔린의 대체 에너지 연구를 하던 도중 과로가 원인이 되어 박영숙이 아홉 살 되던 해인 1941년 사망했다. 이후 어머니와 6남매가 함께 당시 일본의 전시체제 아래 외형적으로 놀라운 경제 성장을 보이던 만주로 이주해 양조장을 경영하던 친척을 도우며 지내다 해방을 맞았다. 이후 귀국해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평양 정의여중에 편입하였고 거기서 8.15 광복을 맞았다. 1947년 월남해서 1950년 광주 전남여고를 졸업한 뒤 이화여자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과에 입학했다.
○ 졸업, 결혼 후에도 끊임없이 드넓은 세상과 만나다
대학재학시절 대한YWCA연합회 청년부와 대학생부 간사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YWCA의 지원으로 호주와 뉴질랜드 전국 순회 연수를 다녀왔다. 1959년에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현 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로 일을 하다가 1959년부터 1961년까지는 필리핀 파이스턴 대학교(Far Eastern University) 대학원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했다. 1963년부터 대한YWCA연합회 총무로 활동을 시작해 1965년 미국YWCA 중견간사 과정을 수료하고, 1967년에는 호주YWCA 중견간사 과정을 수료했다.
1967년 신학자 안병무와 결혼하고 사회적 활동을 잠시 그만두었다가 1970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사무처장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1974년부터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부회장, 1976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전국연합회 교육위원회 위원장,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여성문제특별위원회 위원장, 크리스챤아카데미 여성중간집단훈련 지도자, 한국YWCA연합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 시대적 불의에 저항하며 변화와 개혁의 맨 앞자리에 서서
1976년 2월 19일 박영숙과 남편 안병무의 수유리 집에 문익환,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등이 모여 문익환의 주도로 3.1정신을 되새기고 암울한 현실을 극복한 것을 국민에게 호소하는 선언서를 작성하기로 하는 모임을 갖고, 이후 전 윤보선 대통령 부인 공덕귀, 이태영, 김대중, 정일형 등과 접촉하여 총 12명의 최종 서명(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김관석, 은명기, 윤반웅,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안병무)을 받아 3월 1일 오후 6시에 명동성당에 모여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3.1민주구국선언서 낭독했다. 이후 문익환, 김대중에게는 유신헌법을 비방하고 폐지를 선동한 죄로 징역 8년, 5선 의원 정일형은 의원직을 잃었으며, 안병무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남편 안병무는 한신대학교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다. 이후 구속자 가족 시위를 시작했다.
1981년에는 보건사회부 부녀복지위원회 위원, 1984년 청량리경찰서 여대생성희롱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 가족법개정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1985년 아시아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86년 여성노동자 부당해고 복직운동위원회 위원, 최루탄추방위원회 공동대표, 용공조작 및 고문철폐 대책위원회 공동대표, 한국여성단체연합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86년에 한국여성단체연합 부회장,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고문, 이한열 열사 장례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역할 다하기
1988년 2월 문동환, 이해찬, 김학민 등 재야민주화운동가 98명이 결성한 평화민주통일연구회(이하 평민연)에 참여한 박영숙은 평민연이 지분 50퍼센트를 보장받으며 평화민주당에 집단입당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박영숙은 평민연의 대표로서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맡았다. 이후 김대중이 제13대 대통령 선거 패배 이후 총재직을 사퇴한 상태에서 1988년에는 평화민주당 총재권한대행으로 당을 이끌었고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1988년~1992년)으로 보건사회위원회 위원으로 의정 활동을 했다. 1989년에는 녹색의전화 대표, 1990년 환경기자클럽 선정 ‘올해의 환경인상’을 수상했다. 1991년에는 신민당 최고위원, 신민당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신민당 환경특별위원회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평양에서 개최된 제85차 국제의원연맹 총회에 한국대표단 고문으로 참석하였으며 1991년 국회의원으로 가족법 개정,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에도 기여했다.
○ 환경정책과 여성운동에 마지막 뜻을 품고
1991년에는 환경정책연구소 이사장, 1992년 저서 『녹색을 심는 여인』을 출간하고 유엔 환경개발회의 한국위원회 공동대표, 성폭력특별법 추진위원회 전문위원을 역임하였으며 한국여성단체연합 선정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했다.
1992년부터 2004년까지 (사)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였다.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국제환경정책을 연구하고 돌아와 1994년 명지대학교 지구환경학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이때 남편 안병무는 수시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심근경색증 환자였음에도 아내 박영숙에게 ‘일을 하려면 전문성을 갖고 해야지 열의만 가지고는 안 된다’라면서 정당 활동을 끝낸 환갑이 넘은 62세의 박영숙의 유학을 종용하였다. 이때에 대해 박영숙은 “나는 떠날 용기도 못 냈고 원치도 않았어요. 시집 식구들이 볼 때 환갑 넘은 사람이 환자 남편 두고 공부하러 간다니 얼마나 한심하겠어. 그런데 환자복 입고 자동차 세워놓고 날 기어이 태워서 보냈으니까. 그런데 그 덕을 지금까지 보잖아요. 생전 처음 제대로 공부한 거거든요. 고맙게 생각해요.”라고 인터뷰를 남겼다.
1995년 『지구를 살리는 대변혁』을 한글로 옮겼다. 1995년 서울특별시 녹색서울시민위원회 위원장, 서울의제21 수립위원회 위원장, 1996년에는 서울환경헌장 제정위원, 환경부 중앙종량제추진협의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96년 녹색연합 공동대표, 1997년 제7대 인간과생물권계획 한국위원회 위원, 1998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평화포럼 이사, 1998년 (재)사랑의친구들 총재를 역임했다.
1998년~2006년까지 대통령자문 통일고문회의 고문, 1999년부터 여성환경연대 으뜸지기로 활동을 시작했고, 같은 해에 차별과 빈곤에 시달리는 이 땅의 모든 딸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사회 원로와 124개 여성단체가 새천년의 과제로 여성운동 단체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재정난을 타개할 재단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여성기금인 (재)한국여성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여성운동의 과제로서 (재)한국여성재단을 통한 지원과 활동가 교육의 필요성을 고민한 인터뷰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여성운동의 진짜 위기는 지속가능하지 못한 여건이라는 거예요. 사실 여성운동도 하나의 직업 분야거든요. 지금 각 기업에서는 전문 지식근로자들을 위한 평생교육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 우리 활동가들에게는 지속적인 리더십 트레이닝 기회가 없어요. 활동비도 고작 5, 60만 원이 끝이잖아요. 젊을 땐 열정으로 한다지만 한 십년 지나면 생활인이 되는데 이건 생활이 안 되잖아요. 여성의 빈곤화, 차별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사실 우리 여성단체 실무자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근로자가 없어요.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제 생애 마지막 과제예요.”
2000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선정 ‘김활란여성지도자상’, 2000년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 2001년 이화여자대학교 선정 ‘자랑스러운 이화인상’, 여성부 정책자문위원, 2002년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 녹색서울시민위원회 공동위원장, 2004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 자문위원, (사)미래포럼 이사장, (사)희망포럼 공동대표,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고문, 2006년 국무조정실 저출산·고령화 대책 연석회의 공동의장, 2007년 (주)페어트레이드코리아 이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고문,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로상, 2008년 교보생명 환경문화재단 특별공로상, 2011년 아시아여성 브릿지 두런두런 이사, 2012년 안철수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2013년 5월 17일 지병으로 사망하여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 마지막 순간까지 한결같이
박영숙의 영면 소식에 당시 노회찬 전 의원은 “박영숙 선생님께서 오늘 새벽 운명하셨습니다. 여성과 인권을 위해 바친 한평생은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라는 글을 남겼고, 후배 여성운동가인 한명숙(당시 민주당 의원)도 “여성운동의 대선배인 박영숙 선생께서 오늘 아침 운명하셨다. 편안한 모습으로 영면에 들어가신 선생님은 언제나 당당하고 소박하셨다. 후배들에게 맛있는 밥을 손수 만들어주시던 그 마음은 따뜻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닮고 싶다. 편히 잠드소서”라고 글을 남겼다.
박영숙은 민주화운동과 환경운동, 여성운동을 두루 거친 원로였지만, 운동 환경의 변화에 따라 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내고 일을 만들어가는 솜씨가 젊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영원한 현역’이었다. 원로로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의 인터뷰에서 여성운동의 정치화, 권력화에 대한 우려와 ‘위기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남겼다. “새겨들을 점이 있죠. 정계 진출을 개인의 출세 수단으로 생각하거나 남성문화를 강화시키는 대열에 서는 건 문제라고 봐요. 그런데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것과 여성들이 가진 개혁성이 정치풍토를 바꿔냈느냐 하는 것은 별개 문제예요. 또 지금 우리는 여성운동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 시민사회운동의 위기를 맞고 있어요.”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에 대해서 박영숙은 남편 안병무의 덕이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남겼다. “안 박사하고 산 30년이 제 삶을 바꿔놓은 것만은 확실해요. 결혼 전까지 저는 이른바 기독교인으로서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했다곤 하지만 돌아보면 극히 이기적인 것이었어요. 차 한 잔 얻어먹으면 두 잔으로 갚아버리고 도무지 빚진 의식이라고는 없었죠. 기독교인의 기본정신은 빚진 자의 생각으로 산다는 거거든요. 항상 갚아야 되는. 그런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이웃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마음으로 하는 운동을 알게 되었죠. 사람이 닮아간다고 할까요? 안 박사는 철저하게 남을 배려하는 분이에요. 돌아가실 때 운명 직전에 한 100여 명의 지인들이 찾아 왔었어요. 모두가 배신감을 느꼈다고 하더라구요. 안 박사가 자기만 사랑하고 위해 주는 줄 알았는데 와 보니까 다 그렇게 생각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말했죠. 나도 백분의 일이었다고.” 남편 안병무는 한국 신학계의 거목이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수십 명씩 찾아오는 손님에 이사할 때면 ‘안 박사 책이 한 트럭, 부엌살림이 한 트럭’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2. 문헌연구의 의의
한국 여성운동계의 대모로 불리며 전 생애를 여성, 환경, 민주화와 정치개혁, 시민사회운동에 헌신한 박영숙의 삶을 구술 대신 문헌연구를 통해나마 살펴보고 정리한 것에 의의가 있다. 기독교여성운동가로서 대한YWCA연합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아시아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간사와 사무처장, 위원장으로 활동을 이끌었고 그와 함께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사무처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가족법 개정, 성폭력특별법 제정,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에도 크게 이바지한 정치인이자 여성운동계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박영숙의 생애와 활동을 통해 한국 여성인권과 여성운동의 역사를 함께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이 환경, 민주화운동뿐 아니라,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기독교·시민사회 운동 시대의 중요한 활동을 기록하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던 박영숙이라는 한 인물의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당시의 상황과 역사를 더욱 생생하고 유기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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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사진1) 박영숙 사진자료, “딸들에게 희망을!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기사 링크 https://www.kdemo.or.kr/blog/talk/post/263
(사진2) 박영숙 사진자료, 김현아(2008) 표지사진; 연합뉴스(2018) “여성운동계 대모, 박영숙 5주기 추모행사” 2018년 5월 24일 기사 재인용
<참고문헌>
김현아(2008) 『박영숙을 만나다 : 생을 마칠 때까지 현역으로 살고 싶다』, 또하나의문화: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회(2009) “딸들에게 희망을!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2009년 1월 6일. 자료 출처 https://www.kdemo.or.kr/blog/talk/post/263
연합뉴스(2018) “여성운동계 대모, 박영숙 5주기 추모행사” 2018년 5월 24일. 자료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180524070800005
한겨레(2013) “여성운동의 대모, 박영숙 이사장 타계” 2013년 5월 17일. 자료 출처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5878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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