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여성의 역사를 읽고 미래를 연다
지나온 여성의 역사를 읽고 미래를 연다
노라노
집필자: 김미선
(사진1) 노라노 디자이너의 젊은 시절
(사진2) 2013년 즈음의 노라노
1. 연보
1928.3. 21. | 서울 종로에서 노창성, 이옥경 부부의 10남매 중 셋째로 출생 |
1934.~1939. | 경성 덕수공립보통학교 졸업 |
1940.~1944. | 경기공립고등학교(현 경기여고) 34회 졸업 |
1944. | 경기여고 졸업, 일본군 장교 신응균과 결혼 |
1946. | 이혼 |
1946. | 미군청정에 있는 미용실에서 통역 및 미군청정의 고위직 부인들 대상으로 드레스 제작 |
1947. | 미국으로 패션 유학, 최초의 패션 유학생, 스포츠웨어 회사인 ‘타박 오브 캘리포니아’에서 직장 내 교육 형태로 유학, 그리고 ‘노명자’에서 ‘노라노’로 |
1949. | 미국 Frank Waggon Technical College 졸업 |
1949. | 미국 Taback of California 보조 디자이너 |
1949. | 귀국 후 신당동 자택 2층에서 의상실 개업 (노라노 양장점) |
1950. | 한국전쟁 중 부산 광복동에 의상실 오픈 |
1952. | 서울 중구 퇴계로에 의상실 ‘노라노의 집’ 개업 |
1953. | 종로에 의상실 ‘노라노의 집’ 개점, 비공개 패션쇼 개최 |
1955. | 명동으로 매장 이전 |
1956. | 유럽으로 6개월 패션 연수(프랑스 파리 Academy Julian Art 전문학교) |
1956.11. | 국내 최초 패션쇼 ‘제1회 반도호텔 패션쇼’개최 |
1958. | 노-라·노 횃숀쇼 |
1959. | 미스유니버스대회에서 미스코리아 오현주 3관왕 획득, 노라노 샤프롱으로 지원 |
1959. | 최은희 주연의 영화 <춘희>를 시작으로 영화 의상 디자인 본격화 |
1961. | 퍼스트레이디 육영수의 의상 제작 |
1963. | 명동에 사옥 마련, 의상실 ‘노라노의 집’ 이전 (14평짜리 3층 건물), 마우만 백화점(현 롯데백화점 자리)에 최초로 디자이너 기성복 코너 설치, 국내 최초 기성복 패션쇼(미우만백화점, 현 롯데백화점) |
1964. | ‘기성복 패션쇼’ 화신백화점 |
1965. | 재혼 후 미국 하와이로 이주하여 기성복 라인 쇼룸 개업(하와이 호놀룰루), 하와이 패션쇼 개최 |
1966. | 이혼 및 귀국 후 국내 최초 기성복 도입, 명동 의상실을 기성복 매장으로 리뉴얼 |
1967. | 신촌점 개점 10% 할인 판매, TBC를 통해 전국에 생방송된 윤복희 귀국 기념 첫 리사이틀에서 미니스커트 착용(노라노 제작)과 엄청난 반향 |
1969. | ‘목화아가씨 패션쇼’(YMCA, 극동호텔)를 위해 전문모델 양성 |
1973. | 프랑스 파리의 프레타포르테(기성복 패션 박람회)에 한국 디자이너 최초로 참여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의 요청으로 국산 견직물 컬렉션 준비), 뉴욕 삭스 백화점 진출 |
1974. | 뉴욕 패션쇼 개최, 한국일보에 ‘패션 여화’ 칼럼 게재, 견직물 바이어 패션쇼 |
1975.12. | 서울 퍼시픽호텔에서 기성복 패션쇼 개최, 신세계백화점 노라노 기성복 코너 입점 |
1977. | ㈜예림양행 설립 |
1978. | 뉴욕 맨해튼 7번가의 패션 거리에 진출 (쇼룸 오픈) |
1979. | ‘Nora Noh Inc. New York' 미국 현지법인 설립 (뉴욕 7번가) |
1980. | New York Macy's 백화점 15개 쇼룸 전체 노라노 디자인으로 디스플레이 |
1982. | 안산반월공단 프린트 공장 설립, 실크 프린트 직접 생산, 안산염색공업단지 Sacks Fifth Avenue 백화점 입점 |
1983. | 'Nora Noh West' 설립, New York Nordstrom 백화점 입점 |
1984. | 미국판 『Vogue』에 광고 게재 |
1990. | Nora Textile Limited.' HK(Hong Kong) 현지법인 설립, 'Nora Noh Japan' 일본현지 법인 설립, 명동에서 청담동으로 사옥 이전, 여성브랜드에서 토탈패션브랜드로 브랜드 확장 |
1990. | 일본 진출, 곧 이은 동업 무산 |
1991. | 중국지사 저장성 싸우싱 봉제공장 설립 |
1992. | 미국 뉴욕 매장 철수 |
1997. | IMF 금융위기로 사업 축소, 사옥 1층과 2층 임대, 3층 부틱만 운영 |
2000. | 세계패션그룹 대상 수상 |
2. 성장과정
노라노1)(노명자)는 1928년 3월 종로구 내수동에서 아버지 노창성과 어머니 이옥경 사이에서 차녀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황태자였던 영친왕의 영어교사를 지냈는데, 만주에서 세관을 하는 동안 노라노의 어머니 이옥경(1901년 서울 출생)은 만주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중학교 과정)을 다녀왔다. 노라노의 아버지 노창성은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의 개국 공로자(사업부장)이며 노라노의 어머니는 같은 방송국에서 1926년부터 아나운서로 근무한 ‘우리나라 최초의 아나운서’였다(1930년 노라노 출산 후 퇴직). 노창성은 구라마에공업전문학교(창전공업대학의 전신)를 다녔다. 노라노의 부모님은 모두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녔으며, 노창성은 결혼 후 체신국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
노라노는 7살 무렵 서울 계동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 부유한 가정환경 덕분에 명문학교를 다녔으며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었다. 최승희(최승희의 친오빠 최승일[아내 마현경은 여성 아나운서 2호]은 노라노의 아버지 노창성과는 매우 친한 직장 동료)의 보살춤과 같은 무용 공연을 본 적도 있었다. 또 소공동에 있는 아서원이라는 중국 요리점에도 가서 가족들이 식사를 하거나 영화관도 드나들었다. 노라노는 덕수소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여학교인 경기여고를 다니면서 양재를 배웠다.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으로 양장을 직접 만들어 입기도 하였다. 17살이던 1944년에 정신대로 수많은 조선 여성들이 끌려가는 가운데, 중매가 들어와 육군 소좌 집안(황해도 해주 출신)의 남성과 결혼했다. 군인(신응균 장군)과 결혼한 노라노는 일본으로 건너가 신혼생활을 시작했지만 결혼한 지 2주 만에 그녀의 남편은 전쟁터로 ‘출정 명령’을 받고 신혼집을 떠났다. 노라노는 해방되기 바로 전 시댁으로부터 이혼을 종용 당했는데, 육군 소좌로 승진한 신랑이 전사할 경우 위자료와 생명보험 등 적지 않은 돈이 미망인에게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결국 노라노는 아버지의 조언대로 이혼을 선택했다. 해방 후 어수선한 정국에 노라노의 친정 식구들은 계동의 집을 팔았으며, 노라노는 신당동으로 친정식구들과 이사를 했다.
이혼 후 이화여전 진학을 하려다 그만두고 타이핑을 배워 미군정청의 보건후생부의 여사무원으로 취직을 했다. 노라노의 집에 미스터 남이라는 남성이 잠시 하숙을 했는데, 그의 친구인 미군장교와 두 한국 여성(전직 직업 댄서)이 놀러오기도 했다. 남편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이미 식어버린 마음을 어쩔 수 없었고 결국 완전한 이별을 선택했다. 이후 외국인 장성급의 부인이나 가족이 주로 방문하는 미용실(미군 PX에 위치)에서 영어 통역을 맡았다. 1946년 여름 여러 곡절 끝에 이혼을 했다. 이후 노라노는 미스터 스미스라는 외국인 남성의 비서로 일을 했으며, 우연한 기회에 간장 도매업도 하여 생활이 윤택해지게 되었다. 미스터 스미스는 주말마다 은행 관사에서 파티를 열었고 노라노가 이를 준비했다. 노라노 역시 이 파티에 참여할 기회가 생기자, 가지고 있던 옷감으로 드레스를 직접 만들어 입거나 ‘뉴-서울’양장점에 가서 맞춰 입기도 했다. 미국유학을 떠나고 싶었던 노라노는 미스터 스미스의 추천서를 받아 미국의 ‘타박 오브 캘리포니아’로 패션 유학을 가게 되었다. 여권에 영어식 이름으로 노라노를 적으면서 노명자가 아닌 노라노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3. 미국 유학과 귀국 후의 생활
노라노는 1947년 미국으로 패션유학을 떠났다. 미국의 프랭크 웨건 기술전문학교를 다니면서 패션을 배웠다. 미국식 평면 재단과 유럽식 입체 재단을 정식으로 배웠다. 미국에 있는 동안 ‘여순사건’으로 한국의 정국은 어지러웠고 아버지가 경영하던 제약회사는 부도가 나면서 노라노의 귀국은 앞당겨졌다. 1949년 귀국해 미8군 장교 부인들과 대사 부인들을 상대로 하는 의상실을 자택의 2층에 열었다. 이외에도 무용과 연극에 필요한 무대의상을 만들어 제공했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 노라노는 부산 광복동에서 양장점 동업을 하면서 피난살이를 했다. 이후 대구를 거쳐 서울 신당동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8군에서 쇼를 하는 가수를 위해 의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1952년에 퇴계로에 건물을 임대해 공장과 매장으로 구성된 의상실을 열었다. 또 무대의상을 디자인했는데, 연극 <햄릿> 의상은 대표적인 노라노의 작업물 중의 하나였다.
1953년에는 종로로 의상실을 옮겼다. 처음으로 일반 손님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에는 노라노의 어머니가 점심 준비와 회계를 맡았다. 노라노가 27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위암으로 사망했다.
4. 서울 명동에 양장점을 열고 패션계를 이끌다
노라노는 1955년에 서울 최고의 상권인 명동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를 공부해 ‘패션의 고향’인 프랑스 파리에 미화로 약 5천 달러(당시 서울에서 집 두 채 금액)를 가지고 여행을 다녀왔다. 패션쇼를 구경하며 고급 의상에 대해 많은 것을 공부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동안 스페인, 이탈리아 등 여러 지역에 여행을 다니며 패션을 공부했다. 1956년 유럽 연수를 마치고 귀국해 국산 옷감을 가지고 패션쇼에 쓸 의상을 제작했다. 1956년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개최했다. 패션쇼를 계기로 노라노는 패션계에서 상당히 유명한 패션디자이너로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영화에 의상을 제공하게 되어 최은희, 조미령, 엄앵란 등 수많은 여배우를 위해 의상을 제작했다. 영화 자막에 ‘의상 노라 노’라고 담겨있어 의상실의 홍보 효과도 컸다. 1958년에는 미스코리아 대회를 주관하는 한국일보사에서 미스코리아 의상을 부탁해 샤프롱으로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참석했다. 1959년에는 오현주가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3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1962년 열린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 여배우들이 참석하는 바람에 30벌의 의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한편 노라노는 부산 피난 시절 병원에서 만난 짐 휜클 소령과 재혼하였으며, 1963년 명동에 14평짜리 3층 건물을 사옥으로 장만했다. 그러다가 남편과 함께 하와이로 가서 살기로 하고 이민을 떠났다. 하와이에 정착한 노라노는 부티크를 운영하였으며, 1965년 하와이에서는 한인협회의 후원으로 하와이 패션쇼를 개최했다. 하와이에서 지낸 지 2년 후 한국에 돌아올 때 이혼을 했다.
5. 기성복 시대를 열며 여성 디자이너로서 능력을 발휘하다
노라노는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기성복 시대를 열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1966년 귀국한 노라노는 명동 부티크를 수선하고 기성복 매장을, 미우만백화점(현 롯데백화점 자리) 2층에는 기성복 코너도 마련했다. 때마침 대중적 관심이 영화에서 텔레비전으로 이동하던 시기로, 인기 프로그램에 의상을 협찬하면서 기성복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또한 윤복희와 펄 시스터즈와 같은 가수들은 미니스커트와 같은 의상을 주문해 무대에서 입었다. 이처럼 쇼 비즈니스에 참여하면서 디자이너로서 노라노의 이름도 인기를 끌었다. 1969년에는 한국면직협회가 미국면직협회와 함께 한국의 면직물을 홍보하기 위해 목화아가씨를 선정하고 패션쇼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에 패션쇼를 맡은 노라노는 최고의 국산 옷감(일신방직공장)을 선정해 의상을 마련했다. 특히 목화아가씨에 출연한 패션쇼를 계기로 직업 패션모델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패션쇼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노라노는 방직협회로부터 ‘코튼개발공로상’을, YWCA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한편 노라노는 1973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의 요청으로 국산 견직물 컬렉션을 준비해 파리에서 열리는 기성복 패션쇼인 프레타포르테에 진출했다. 당시 코트라는 원사를 수출하기 보다는 부가가치가 높은 직물이나 옷으로 만들어 수출하는 길을 찾고 있었다. 국산 견직물 옷감을 활용해 패션쇼에 출품할 의상을 제작했다. 패션쇼를 계기로 우리나라 무역사상 처음으로 국산 소재로 만든 ‘하이패션’이 수출되었다. 주문자는 미국 뉴욕의 5번가에 위치한 삭스 백화점 2층 디자이너 코너 담당 바이어였다. 이를 계기로 대한잠사협회로부터 해외시장 개척 공로상을 받았으며, 미국 패션 전문 일간지인 《우먼스 웨어 데일리》와 《뉴욕 타임즈》에 관련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1974년에는 《한국일보》에 패션을 소재로 기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1974년 신세계백화점 2층에 노라노 기성복 코너를 열었으며, 1975년 12월에는 서울 퍼시픽호텔에서 대규모 기성복 패션쇼를 열었다. 한편 1966년 신촌 대학가에 의상실 지점을 열기도 했다. 잠사협회는 실크의 소비 촉진을 위해 미국 시장을 겨냥해 패션쇼 개최를 요청해왔는데, 이에 노라노는 코트라 지원을 받아 뉴욕에서 실크 패션쇼를 개최했다. 그리고 1979년에는 뉴욕 맨해튼 7번가의 패션 거리에 ‘노라 노’ 간판을 걸고 쇼룸을 열었다. 뉴욕의 고급 부티크 바이어로부터 주문이 쏟아졌다. 이를 계기로 뉴욕 7번가의 떠오르는 디자이너로 손꼽혔다. 이처럼 미국에서 판매가 성공적임에 따라 수출 상품을 따로 만드는 공장을 마련하고 재봉사 100명을 채용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카피제품이 판매되어 노라노 만의 특수 프린트를 위해 반월공단에 프린트 공장을 마련했다. 1983년 뉴욕의 삭스 백화점 5층에 정식으로 노라 노 매장이 생겼다. 1985년에는 미국판《보그》5월호에 노라노의 디자인이 실렸으며, 1987년에는 《하퍼스 바자》에 실렸다. 1988년에는 중국 진출을, 1990년에는 일본 진출을 시도했다. 1990년에는 명동을 떠나 강남 청담동으로 140평 규모의 사옥을 마련해 이전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세계 시장은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결국 뉴욕의 쇼륨을 닫으며 미국 컬렉션을 마무리했다. 1997년에 국제통화기금 문제로 노라노 재팬도 철수했다. 2000년 후배 디자이너들이 선정한 세계패션그룹 대상을 수상했다. 노라노의 대표적인 여성 고객으로는 여성 최초의 종합 일간지 사장 장명수, 이화여고 교장을 거쳐 국회의원을 지낸 정희경, 우리나라 외교사상 최초의 여성 재외 공관장 이인호,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 작가 박경리 등이 있다.
노라노는 식민지, 한국전쟁, 산업화 등 한국의 격동기와 함께 하며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패션쇼, 기성복 도입, 기성복 해외 수출 등 한국의 의류산업에서 굵직굵직한 역할을 맡아왔다. 1956년 국내 최초 패션쇼 개최, 1966년 국내 최초 기성복 도입, 역대 퍼스트레이디 의상 제작, 국내 최초 전속 영화 의상 디자이너, 1960년대 미니스커트와 판탈롱 등 유행 선도, 윤복희와 엄앵란 등 국내 최초 연예인 스타일리스트, 연간 1,000만 달러 이상 대미 수출 실적을 올린 유일한 디자이너, 2017년 현재 아흔의 현역 최장수 디자이너 등이 그녀를 표현하는 수식어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노라노가 걸어온 길은 곧 한국의 패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노라노는 패션디자이너였을 뿐만 아니라 무대와 영화의상을 제작하는 아티스트이자 사업가이기도 했다. 한편 노라노는 군인과 이혼을 하면서 ‘인형의 집’을 나온 노라노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주체적인 자세로 자신의 삶을 선택했으며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녀가 만드는 의상에도 반영되었다. 여성들이 당당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아름다우면서도 편리한 의상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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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헨릭 입센이 1879년에 발표한 『인형의 집』에 나오는 여주인공 노라의 이름을 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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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사진1) 노라노 디자이너의 젊은 시절, http://www.koreafashionnews.com/643
(사진2) 2013년 즈음의 노라노, https://www.joongang.co.kr/article/13033413#home
<참고문헌>
최효안(2017), 『노라노 : 우리 패션사의 시작』, 마음산책.
노라노(2007), 『노라노, 열정을 디자인하다 : 최초의 알파걸, 최고의 패션 패셔니스타』, 황금나침반.
노라노(2012), “노라노 구술자료”, 아르코 예술기록원. https://www.daarts.or.kr/handle/11080/26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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