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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사자료실

지나온 여성의 역사를 읽고 미래를 연다

문헌자료


오희순

관리자 2023-02-03 조회수 106

오희순

집필자: 안태윤




1. 연보

1911.2.19.

경남 동래군 사중면 초량리에서 34녀 중 2녀로 출생

1931.3.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1931.4.~1932.10.

일본 큐슈 소재 사회사업기관 쇼와칸 서기관으로 근무

1933.3.~1934.10.

경남 김해군 명지국민학교 촉탁교사로 근무

1935.2.

이일동(합동은행 부산지점 서무과장)과 결혼

1943.

광주로 이사

1945.8.18.

남편 사망(슬하에 22)

1946.6.

조산원(조산사) 면허 취득

1946.11.~1978.12.

조산업을 개업하여 운영

1949.3.~1968.

()대한조산협회 전남지부장

1955.4.~1968.2.

()대한어머니회 전남지부 최고위원

1962.10.~1968.2.

)대한가족계획협회 전남지부 부지부장

1968.2.

서울로 이사하여 하월곡동, 창동에 조산원으로 활동.

1968.4.~

()대한조산협회 이사, 부회장, 감사, 명예회장 등 역임

 


2. 성장과정과 학창시절

오희순은 1911년 부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희순의 집안은 대대로 독실한 불교가문이었으나, 희순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인도로 주일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이후 한평생 기독교 신앙을 갖고 살았다. 소녀시절 희순의 할머니는 천식 때문에 매년 큐슈대학병원으로 전지요양을 갔는데, 이 때 희순은 언니와 교대로 할머니의 간호와 통역을 위해 일본행에 동행했다. 이 여행에서 희순은 관부연락선의 3등 대합실을 가득 메운 조선인들을 보며 불쌍한 동포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서당에서 부산공립국민학교 여자부로 옮긴 희순은 19263월 최우등상인 도지사상을 받으며 학교를 졸업했다.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후에 경남여고)에 진학해서는 학업뿐만 아니라 운동에도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희순은 9살 때 경험한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당시 기독교계 민족운동단체인 근화청년회의 회원이었고, 여학교 재학 중에는 민족의식으로 인하여 4번 무기정학을 당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후 학생들의 동태를 묻는 일본인 교장에게 만세운동 거사의 모의를 숨겼던 일, 일본 수학여행때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일, 정학기간 동안 한복차림으로 사진을 찍은 일, 교내에서 조선말을 사용한 일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퇴학은 면했지만, 이로 인해 사상불온으로 일본 유학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대신 희순은 일본유학을 염두에 두고 일단 먼저 시모노세키의 사회복지기관인 쇼와깐(소화관)에 서기로 취직했다. 주 담당업무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지도와 예금관리였으나, 이외에 조선인 부락을 다니며 위생강연을 하고, 임산부의 분만 시중도 했다. 이 일은 이후 희순이 조산계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2년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에 헌신한 나머지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귀국 후에는 501의 경쟁률을 뚫고 김해군 명지국민학교에 촉탁교사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에서 일할 때 모교의 교사로부터 교지에 기고할 원고 청탁을 받고 쇼와칸에서의 생활을 적은 글을 보냈는데, 이 글을 읽은 일인 교사가 희순을 높이 평가하여 써준 추천서가 촉탁교사가 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교사 재직 시에는 쇼와칸에서의 경험을 살려 농촌 부녀자들을 위하여 부인야학을 개설하고, 농번기에는 탁아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3. 남편 사별 후 조산사가 되다

19352, 24살의 희순은 모교 은사의 중매로 당시 합동은행 부산지점 서무과장이었던 이일동과 결혼했다. 남편은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병약하여 병치레가 잦았다. 남편의 병세가 악화하자 희순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다케다 조산부양성소에 지원하려 했지만, 남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병세가 심해진 남편을 서울 여의전병원(현 고대부속병원)에 입원시켰지만, 태평양전쟁 말기라 좋은 약을 구할 수 없었다. 광주의 지인이 좋은 약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접하자 남편의 치료와 전쟁을 피해 1943년 말 광주로 내려갔다. 남편을 전남의전부속병원에 입원시키고 의학공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희순은 현덕신병원에 조산실습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숙부와 고모부의 지인으로 여의사였던 현덕신의 배려로 100건 이상의 산건을 실습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1945818, 해방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희순의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11살에서 2살배기까지 4남매 부양을 위해 희순은 낮에는 삯바느질을 하고 밤에는 한지의(限地醫)3)가 되기 위해 시험공부에 몰두했다. 그러나 무리한 생활로 건강을 해쳐 시험을 포기하고 조산원(조산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19461월에 예비시험, 5월에 본시험에 합격하고, 6월 조산원(조산사) 면허증을 받은 희순은 광주시 동명동에서 첫 개업을 했다.

 


4. 조산사로서 헌신적으로 일하다

당시 동명동은 빈민촌으로 조산일의 2/3는 무료였다. 산가에서 산료는 정해진 가격이 없어 형편대로 알아서 달라고 했고, 주는 대로 받았다. 돈이 필요했지만,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신용과 봉사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되겠다는 신조로 잠 잘 시간도 줄여가며 산모를 돌보았다. 6.25 이전에는 통신망도 교통수단도 미비하여 산가에서 직접 혹은 인력거로 조산사를 데리러 왔다. 6.25 전쟁 중에는 인력거를 타고 급히 산가로 가는데 머리 위로 총탄이 날아가고 도중에 몇 번이나 검문검색을 받기도 했다. 당시 호남지방 조산사들은 산간벽지와 도서지방까지도 조산을 가야했던 시절이었다.

 

6.25 전쟁 중에는 부상병 간호에도 참여했다. 부상병 수가 늘자 전남방직공장에 부상병들을 수용했는데, 희순은 그곳에서 숙식하다시피 하며 부상병들을 간호했다. 부상병 간호와 대한부인회 이사, 동명동 부인회장으로 활동한 이력으로 인해 인민군의 수배대상이 되어 국군이 들어올 때까지 숨어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남하한 피난민들과 군인부락에서 조산활동을 하며 많은 산건을 접한 덕분에 조산술은 한층 연마되었다.

 

오희순은 조산사로 일하면서 당시 미신에 의한 비위생적인 해산풍속을 타파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산모의 요 위에 볏짚을 깔면 아기에게 복이 된다는 미신은 산모에게 파상풍과 산욕열을 일으킬 수 있었다. 집 주인이 한 해에 아기 둘을 낳지 못한다고 하여 세입자인 산모를 마당 한 구석에 천막을 치고 산실을 마련한 경우도 있었다. 창동에서 개업하던 1975, 자취하던 대학생이 아기를 낳아 그 집에 가보니 아기에게 이불을 뒤집어 씌우고 산모가 한 쪽 다리를 얹어놓고 있었다. 얼른 이불을 제치고 인공호흡으로 아기를 살리고, 산모의 동의를 얻어 아기를 고아원으로 보낸 일도 있었다. 또 십대 소녀가 씨받이가 되어 아기를 조산하자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모유를 먹여야 한다고 부인을 설득, 따로 방을 얻어 3개월간 산모가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도록 한 일도 있었다. 또한 뿌리깊은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산모의 건강 보다 아기의 성별을 우선시하는 현상도 많았다. 산모는 과다출혈로 빈사상태이고 아기는 죽어있었는데 남편은 노름판에서 노름을 하느라 와보지도 않은 집도 있었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며 오희순은 국민의 의식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재건국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오희순은 조산사로 일하면서 4남매를 대학까지 공부시켰다. 대학을 마친 4남매 중 셋이 서울에 자리를 잡자 희순도 19682월 서울 하월곡동으로 이주, 조산사로 일했다. 당시 달동네로 하루 2~3번 왕진을 가보면 산모들은 거의가 심한 임신중독증이었다. 3년 후 출장분만에서 의료기관으로서의 조산소를 창동에서 개업하고 6년간 활동했다. 조산사로 총 34년간 3,700여명의 아기를 받았지만, 출산으로 죽은 산모는 한 명도 없었다. 대과없이 30여년 조산사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임산부 중심으로 생각하고, 힘에 부치면 의사에게 도움을 청해 제왕절개수술을 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반대급부로 산건을 많이 알선해주었다. 대학병원 의사 중에도 자기 부인의 해산을 희순에게 청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5. 가족계획사업에 적극 참여하다

광주에서 오희순은 오전에는 조산활동을 하고, 오후에는 대한조산협회 전남지부 사무실에 나가 가족계획 상담과 지도, 모자보건 상담, 여성단체 일을 하고, 귀가 후에는 언론 기고를 위한 원고 집필, 주말에는 국민운동 전남지부 부위원장으로서 농촌에서의 가족계획 강연과 여성의 부업문제 교양강연까지 맡았다. 가족계획 자매결연 부락인 광천동 난민촌에 가서도 가족계획 상담과 지도 등 바쁜 일과의 연속이었다. 오희순이 이처럼 가족계획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일찍이 일본 쇼와칸 근무 시절 많은 수의 자녀양육으로 고생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보면서 산아제한의 필요성에 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고, 마가렛 생거의 저서에도 깊이 감명을 받았다. 무엇보다 조산사로 일하면서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남아출산을 위해 여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몸소 체험하게 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어느 날 딸 넷 둔 산모의 딸 쌍둥이를 받았는데, 다음 날 가보니 두꺼운 이불에 덮혀 아기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가족계획사업에 적극 몸담게 되었다.

1955년 대한어머니회 광주시지부 보건부장을 맡으면서부터 오희순은 본격적으로 가족계획사업에 뛰어들었다. 수태조절(터울조절), 산아제한, 모자보건, 일반 위생강연에 연사로 활동했다. 1961()대한가족계획협회가 설립되고 가족계획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오희순은 가족계획 기간요원 양성교육에 전남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관련 교육을 받으면서 가족계획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습득했다. 19615.16 이후 재건국민운동 광주시 부위원장에 임명되어 가족계획계몽활동에 주력하면서 부녀교실도 운영했다. 19627월 일본 강습에 참여한 후에는 조산사활동의 반 이상을 가족계획사업에 헌신했다. 196210월 가족계획협회 전남지부 부지부장(지부장은 송인현 전남의대교수)로 피선되었는데, 이는 당시 재건국민운동 광주시 부위원장으로서 주부교실을 창설하여 가족계획 계몽활동을 하던 것이 참작되었던 것이다. 펫사리 사용법 등 회원들에게 가족계획강습을 실시하고, 조산원협회 지부 사무실에 가족계획상담소를 설치하여 약 6개월간 무료상담도 했다. 상담에는 미혼모상담, 유아 이유지도 외에도 결혼문제 등 여성들의 인생상담이 적지 않았다. 재건국민운동 광주시지부에서는 비서와 차를 내주어 오희순은 전남 일대를 다니며 여성생리해부도를 걸어놓고 강연했다. 남성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남성 대상 강의도 했다.

 


6. 조산사협회 조직과 조산소 설치 법안 제정을 위한 헌신

오희순은 조산사 생활 33년 중 반은 협회 일에 헌신했다. 그 때문에 조산사로만 일했다면 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는 조산사들의 권익신장과 남아선호문화에서 여성들이 출산에서 겪는 아픔을 돕는 일 등 사회참여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66월 조산사 면허증을 받자 마자 오희순은 광주시 개업 산파들을 설득하여 광주시 산파회를 조직했다. 산파회 발기에 앞서 친척인 전남도청 상공과장의 도움으로 소독복과 소독포용 광목 16필을 배급받아 발기회때 산파들에게 광목 한 필반씩을 나눠주었다. 194611월 광주시 산파회가 발족되자 총무직을 맡았다. 19464월에는 광주시 산파 12명의 발기로 전라남도 산파회가 창립되었다. 오희순은 19494월 전남 산파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산파회의 설립은 회원들의 권익옹호와 영업협의, 기술연마 도모가 주목적이었다. 오희순이 18년간 대한조산협회 전남지부 회장을 역임하면서 집중한 일 중 하나는 회원 재교육이었다. 협회 월례회에 각 과별 의사를 초빙한 강의를 개설했고, 각지에서 회원들이 열성적으로 교육에 참여했다. 대한조산원협회 전남지부는 19533월 우량아선발대회를 개최했고, 19615월에는 전남지부 사무실을 광주시 YWCA건물 3층에 마련했다. 1961년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창립되고 19622월 보건사회부 추천으로 일본 가족계획지도요원 강습회에 참석, 강습회때 일본의 조산원 현황을 보고 귀국 후 조산원 설치를 위해 정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1971년에는 청와대로 육영수여사를 방문하여 보사부와의 교섭에서 실패를 거듭했던 조산원 설치와 조산원에서 응급처치가 필요한 이유를 브리핑했다. 육여사는 깊은 관심을 나타내며 도와줄 의사를 비쳤다. 그 후 1973년 마침내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어 조산소 설치가 허가되었다. 1971년 중앙회 총회 시에는 협회 회관 신축을 역설하여 건축비를 모금하기로 결의, 마침내 쌍문동에 협회 중앙회 건물을 신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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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지의료인을 의미. 한지의료인이란 허가받은 지역에서 의료업무에 종사하는 의료인(의료법 제79)으로 한지의료인 자격시험은 1951년에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오희순, 1985, 빛과 어둠 사이에서-조산원 생활로 보낸 반평생-, 서울: 수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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