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여성의 역사를 읽고 미래를 연다
지나온 여성의 역사를 읽고 미래를 연다
정칠성
집필자: 김미선
(사진1) 30대 초반 정칠성
(사진2) 정칠성『제일선』 2권 5호, 「연단일화」의 정칠성 씨(1932)
1. 연보
1897. | 경상북도 대구 출생 |
1905. | 기생 수업 시작 |
1915. | 상경하여 다동기생조합 가입 |
1916. | 한남권번 소속 |
1919. | 3.1운동 참가, 도쿄영어강습소 수학 |
1922. | 동경에서 여자흥학회 간사로 활동, 삼월회 발기인 |
1923. | 귀국, 물산장려운동에 참가. 10월 ‘대구여자청년회’ 창립 및 집행위원 |
1924. 5. | 조선여성동우회 결성 및 발기인이자 집행위원 |
1925. 3. | 경상북도 도 단위 사상 단체 사합동맹 결성, 3.31. 도쿄여자기예학교(재봉학교) 입학,《로자 룩셈부르크-여성과 사회》 팸플릿 발간, 삼월회 참여 |
1927. 5. | 근우회 결성 참여, 중앙집행위원, 신간회 창립 발기인 |
1928. | 조선여자직업사 창설, 근우회 경성지회 설립준비회 발기인 |
1929.6. | 신간회 북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 |
1929. 7. |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 조선어사전편찬회 창립 발기인 |
1930. | 근우회 해소, 시기상조론 제기 |
1931.5. | 신간회 해소론 수용, 신간회 전체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해소위원)으로 선출 |
1932. | 평양여자소비조합 조직준비위 기초위원 |
1935. |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 |
1936. | 조선일보사 퇴사. 경성·평양·대구·통영에서 편물강습으로 생활 |
1937. | 장진 대동광업소 근무 |
1938. 5. | 장진 삼포금광배급소 주임 |
1945. 9. | 경북도당 책임부녀장, 조선부녀단체대표자대회 소집준비위원회 준비위원, 조선부녀총동맹 결성대회 임시의장, 부총 중앙위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성지회 상임위원 |
1946.~1947. | 남조선부녀동맹 중앙위원으로 선출, 부총 부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 |
1948. | 남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위원,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 |
1955. |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
1956. |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후보 |
1957. | 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평안북도 대의원 |
1958. | 반종파투쟁 때 반혁명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 |
2. 성장과정과 기생 금죽으로서의 시기
정칠성은 1897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8살 때부터 기생수업을 받았다. 8살 때 우연한 기회에 대구 관찰사의 잔치를 구경하다가 소리를 하는 기생의 모습을 보고 기생 공부를 시작했다. 기생이 되면서 ‘기생 정금죽’으로 불리웠다. 가야금, 단가, 그리고 소리를 잘 했다. 1916년 다동조합에 있다가, 이듬해인 1917년 8월 1일 한남권번 소속이 되었다. 기생으로 일하는 동안 말 타기를 한 적이 있는데 장안에 화제가 되어 신문에 사진과 함께 기사화되기도 했다.
기생으로 살아가던 정칠성은 1919년 3.1운동에 의해 인생의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3·1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만세운동의 행렬에 참여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사상기생’이 되었다. 여기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자신의 이름을 정금죽에서 정칠성으로 바꾸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3. 일본 유학과 지역운동 그리고 사회주의 여성운동가가 되다
정칠성의 첫 번째 일본유학은 1919~1923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때는 도쿄영어강습소에서 어학과 타이핑을 익히고 돌아왔다. 1923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경성으로 가지 않고 고향인 대구로 가서 지역에서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대구 명신학교 강당에서 이춘수와 함께 대구여자청년회를 결성했으며, 정칠성은 창립위원과 집행위원을 맡았다. 대구여자청년회는 민족주의적 교육 및 계몽운동을 비판하고 출발한 단체로, 종교단체 외에는 조직적인 단체가 없던 대구에 여성단체가 생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당시 대구여자청년회는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 지원 활동에 관심을 갖고, 1927년까지 매년 편물강습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의 경제활동을 지원하였다. 이는 정칠성이 1920년대 초기부터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 여성해방에 가장 중요한 토대라고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이듬해인 1924년에 정칠성은 경성으로 올라와 조선여성동우회 설립에 참여했다. 단체 명칭을 처음에는 경성여성동우회로 했으나 전국적인 의미를 갖는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로 바꾸자고 주장해 이를 관철했다. 이 단체는 한국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하는 여성사상단체로 정종명, 박원희, 주세죽, 허정숙 등이 창설하였으며, 주로 여성 대중에게 사상 선전과 교양 활동에 힘을 기울이면서 여성노동운동을 지도했다. 이 조직은 1923년 경성고무여직공들의 동맹파업으로 표출된 여성노동자의 진출이 조직 결성의 배경이 되었다. 특히 1924년 3월에 인천 선미 여성노동자의 동맹파업을 계기로 정칠성은 인천노동총동맹회에 주세죽과 함께 상무집행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이를 계기로 10월 12일 인천선미여공조합이 조직되었다. 당시 정칠성은 사회주의 여성운동단체 결성 과정에서 동지 규합과 여성노동운동의 지도를 담당했다. 당시 조선여성동우회는 1924년에 처음으로 국제무산부인데이를 기념하는 강연회를 개최하려고 했으나 경찰의 금지로 열지 못했다. ‘여성의 날’ 기념식은 결국 해방 후 1946년에야 비로소 개최될 수 있었다. 조선여성동우회는 이후 1925년에 경성여자청년동맹이라는 여성단체를 조직했다.
정칠성의 두 번째 일본 유학은 1925~1926년에 이루어졌다. 정칠성은 이춘수와 함께 일본에 가서 일본도쿄기예학교에서 양장기술을 배워왔다. 이는 당시 여성들 사이에서 양장에 대한 관심이 부상하면서 식민지 조선 여성들에게 새로운 기술직으로서 관심이 집중된 된 것이다. 두 번째 일본 유학을 갈 때는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일본에서 활동 중인 사회주의 사상 여성단체 삼월회(三月會)에 참여했으며, 이 조직의 발기인이자 조직가로 참여했다. 이 단체는 조선인 사회주의 단체인 일월회의 자매기관으로 일월회, 재일본조선무산청년동맹,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등 재일조선인 사상단체들과 함께 1920년대 중반 재일조선인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삼월회의 주요 구성원은 김필애, 고원경, 권명법, 박순천, 백신애, 이춘수, 이현경, 주경애, 조재룡, 정칠성, 한신광, 황신덕 등이었다. 정칠성은 유학시절 대회나 연설회 등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경제·과학·역사와 관련된 서적을 폭넓게 읽었다. 특히 베벨의 『부인론』을 감명 깊게 읽었으며, 일본의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야마카와 기쿠에와도 교류했다. 정칠성은 1925년 3월 24일 도교에서 발간된 사회주의 팸플릿《로자 룩셈부르크-여성과 사회》의 발행인으로 참여했다. 이 팸플릿의 주된 내용은 기쿠에 저서의 조선어 번역으로, 기쿠에의 페미니즘 이론과 사회주의 사상, 특히 여성노동자를 운동 주체로 강조하는 이론이 포함되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 계층과 여성노동자를 운동 주체로 내세운 기쿠에의 여성해방론은 이후 정칠성의 국내 활동의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즉, 정칠성은 연초공장 등의 여성노동자를 새로운 신여성의 상(像)으로 제시함으로써 무산혁명론이 여성노동자 혁명론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1927년 정칠성은 신간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이어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종로 공평동 소재) 결성에 참여하여 발기인, 전형위원,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28년 임시 전국대회 자격심사위원, 1929년 2회 전국대회 준비위원회 안건 책임자를 거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31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정칠성은 근우회 활동을 하는 동안 1928년과 1929년에 지회의 설립 대회에 파견되어 지회 설립을 지원하고 근우회 중앙의 여성운동론을 전파했다. 1929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진행된 근우회 전국대회를 계기로 중앙에서 정칠성의 역할과 위상은 크게 강화되었다. 이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된 정칠성은 근우회 강령 수정위원을 맡았고, 수정된 강령에는 농민부인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고 부인 노동자의 임금 차별 철폐 및 산전산후 2주간의 휴양과 임금지불이 추가되었다. 정칠성은 또 교양부를 폐지하고 출판부와 노동부를 신설했다. 노동부의 신설은 잡지 발간과 노동자와 농민 여성의 지원이라는 운동방침의 변화를 고려한 것이었다. 1929년 5월《근우》가 정칠성을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하여 창간되었다. 근우회 활동을 하며 정칠성은 이유 없는 검거에 시달렸다. 특히 정칠성은 근우회 활동을 하면서 문맹퇴치와 같은 계몽운동으로 의식을 높여 여성이 운동의 주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이후 근우회가 해소되는 과정에서 정칠성은 시기상조론을 제시하며 노동자·농민 여성의 해방이 곧 여성해방이라고 여겼다. 1920년대 후반은 ‘정칠성·정종명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사회활동에 있어서 활약이 두드러졌다. 두 여성은 근우회의 쌍두마차로 번갈아가면서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근우회를 하는 동안 1928년 정칠성은 자신을 교장으로 하여 ‘조선여성직업사’를 설립하였다. 이 단체는 여성들에게 자수와 재봉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한편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으며, 1930년에는 조선공산당과 관련하여 3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투옥된 적도 있었다.
한편 정칠성은 근우회가 해소되고 편물 강습도 그만둔 뒤 한동안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활동을 하다가, 가회동 집에서 지내면서 친지 방문과 산책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정칠성은 1930년에 ‘분옥수예사’를 열고 자수와 편물을 가르쳤다. 정칠성은 아들의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직업을 갖기도 했다. 특히 정칠성의 편물 강습 및 조선여자직업사 편물부 교사 생활은 근우회 결성 시기와 궤를 같이 한다. 당시 정칠성은 잡지에서 ‘재봉 선생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편 아들인 이동수(남편이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남조선노동당 당수 박헌영 체포령이 내렸을 때 박헌영을 호위한 이가 정칠성의 아들 이동수로 알려져있다)의 학비를 마련하느라 상당한 곤란을 겪기도 했다.
4. 해방 이후 좌익활동과 월북
해방 이후 정칠성은 여성운동 지도자로서 상당한 활약을 펼쳤다. 1945년에는 경북도당 책임부녀장, 조선부녀단체대표자대회 소집준비위원회 준비위원, 조선부녀총동맹 결성대회 임시의장, 부총 중앙위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성지회 상임위원 등을, 1946~1947년에는 부총 부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을, 1948년에는 남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위원,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으로 선출 되었다. 특히 정칠성은 조선부녀총동맹의 활동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활동으로 미군정 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며 여러 차례 검거를 당했다.
정칠성은 1948년 4월에 월북한 후, 1955년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1956년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후보, 1957년에는 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평안북도 대의원을 역임했다. 그러나 1958년에는 반종파투쟁 때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꿈꾸다
정칠성은 가양금산조 분야로 이화여전 음악과에서 교수로 청을 받았으나 거절할 정도로 소리를 잘 하는 예술가였으며, 편물을 강의하는 기술자였고,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운동했던 사회주의 이론가였다. 뿐만 아니라 여류 정객으로 평가될 정도로 사회비판가이자 분석가였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아울렀던 정칠성의 이력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것은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일본 유학시절 도쿄여자기예학교를 다니며 배운 편물을 계기로, 1927년부터 동아일보사가 주최하는 편물 강습회(모사편물강습회)의 강사로 참가했으며, 자수나 재봉, 편물을 가르치는 상점을 열기도 했다. 또 정칠성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근우회 활동 중에서도 전국 강연 이외에 꾸준하게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실기교육을 실시했다. 근우회 해소 이후 서울 낙원동에 문을 연 ‘분옥수예사’를 통해 1930년대 내내 여성들에게 자수와 양재, 편물을 가르치는 등 직업교육을 전개했다. 정칠성은 가정과 남성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않으면 노예 상태를 면할 수 없다는 신념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정칠성에게 있어서 여성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려면 경제적 독립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즉 여성의 경제적 독립은 부양가족에 대한 남성의 특권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 방법이기도 했다.
또한 정칠성은 철저하게 여성노동자의 틀 안에서 직업여성의 의미를 규정하고자 했다. 특히 해방 이후 무산여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정칠성은 여성해방의 첫 번째 길은 여성의 사회활동이라고 여겼으며, 이를 위해 수반되어야 하는 것으로 주택과 부엌의 개량 등 여성에게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편리한 생활환경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가정은 부부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보았으며, 여성이 필요한 기관을 설치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더욱이 정칠성은 1930년대 자유주의 계열이 주도한 생활합리화 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신여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닿아있다. 정칠성은 허정숙과 함께 식민지 조선에서 콜론타이즘의 실천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만하지만, 여성의 경제적 독립 문제에 보다 주력했다. 이는 다른 사회주의 여성들인 허정숙, 주세죽, 황신덕 등이 유복한 집안의 출신이거나 처음부터 여학교 출신인 것과는 달리, 기생 출신의 정칠성은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졌기에 여성해방을 위한 방법에 대한 모색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정칠성은 대구와 경상도 등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을 전개한 특징이 있다.
한편 정칠성은 근우회의 다른 여성 활동가보다 성적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계속해서 ‘기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으며, 그녀의 활동은 남성들에 의해 웃음거리로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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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사진1) 30대 초반 정칠성, 동아일보 1928년 1월 6일자 https://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22323
(사진2) 정칠성『제일선』 2권 5호, 「연단일화」의 정칠성 씨(1932), 국립중앙도서관 https://nl.go.kr/NL/contents/N20103000000.do?schM=contView&schOpt1=CA0000000049&schOpt2=CA0000000600&schOpt3=07&schIdSub=CO202012042019267781
<부록 1> 식민지 시대 및 해방 이후 조선에서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개괄
1) 식민지 조선에 사회주의 여성운동이 대두하기 이전
- 1921년 6월 : 제2회 국제공산주의 여성회의에 남만춘이 조선 대표로 참석
- 1922년 1월 : 제1회 극동제국노동여성회의에 상해 대한애국부인회 권애라, 김원경 조선 대표로 참석
2) 1922년 4월 ‘조선여자고학생상조회’ 발족
- 정종명, 김영준, 전유덕, 유현숙 등 20 여명이 빈곤과 고독에 우는 여자고학생을 위해 상부상조하는 취지로 결성
- 소외된 여성에 대한 교육을 강조함으로써, 이전의 여성운동과는 새로운 경향을 보임, 1923년 경 여성문제 강연회 개최함.
- 정종명이 핵심 인물로, 무산계급여성의 해방을 강조, 1923년 정종명은 코민테른 지부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에 설치한 코민테른 극동총국 산하 꼬르뷰로의 국내조직인 꼬르뷰로 국내부의 공산청년회에 가담, 유일한 여성 공산청년회 회원
3) 1924년 5월 ‘조선여성동우회’ 창설, 그 이후 1925년 ‘경성여자청년동맹’ 창립, 1925년 ‘경성여자청년회’ 창립,
- 정종명, 박원희, 주세죽, 허정숙(집행위원) 등이 참여해 창설. 이외에도 김필애, 정칠성, 김현제, 홍순경, 오수덕, 고원섭, 우봉운, 지정신, 최성삼, 이춘수 등이 참여.
- 조선 여성운동은 부르조아 여성교육계몽운동에서 사회주의 여성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함.
- 계급적 여성해방을 표방한 최초의 여성단체로, 당시 지도적인 여성 사회주의자들을 망라하였음.
4) 1927~1931년 좌우합작 여성단체 ‘근우회’ 창립, 그리고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 여성운동 쇠퇴
5) 1945년 해방과 함께 좌우합작 여성단체 ‘건국부녀동맹’ 창립
6) 1945년 조선부녀총동맹(부총) 창립 : ‘건국부녀동맹’에서 우익세력의 여성이 나간 후 남아있는 좌익여성들이 창립 : 정칠성은 부위원장을 역임
7) 1947년~1948년 남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 유영준(劉英俊) 위원장
<참고문헌>
노지승(2016), “젠더, 노동, 감정 그리고 정치적 각성의 순간 : 여성 사회주의자 정칠성의 삶과 활동에 대한 연구”, 『비교문화연구』제 43집, 7-50쪽.
노지승(2022), “사랑, 돌봄, 사적 영역의 변혁 가능성과 한계: 식민지 시기 콜론타이즘의 유산들”, 『한국근대문학연구』, 151-187쪽.
박순섭(2019), “정칠성 : 여성노동자를 대변한 근우회의 리더”, 『내일을 여는 역사』76호, 134-143쪽.
박정애(2015), “정칠성”, 『한국 근대 여성 63인의 초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윤정원(2021), “‘여자 청년’의 등장 : 1920년대 ‘대구여자청년회’ 활동을 중심으로”, 『대구경북연구』제20권 3호, 139-158쪽.
이임하(2019), “사람이 있고 운동이 있다 : 정칠성”, 『조선의 페미니스트 : 식민지 일상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 철수와영희.
이임하(2021),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철수와영희
전상숙(2001), “‘조선여성동우회’를 통해서 본 식민지 초기 사회주의 여성지식인의 여성해방론”,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3-57쪽.
진선영(2019), “기름에 젖은 머리를 턱 비어 던지고: 사회주의, 여성주의, 지역주의, 혁명가 정칠성의 겹서사 연구”, 『한국문화연구』37호, 251-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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