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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료

최순영, 1970년대 YH무역 여성노동운동과 여성노동운동가에서 지역운동가로의 삶의 전환

관리자 2022-04-05 조회수 38



1970년대 YH무역 여성노동운동과 여성노동운동가에서 지역운동가로의 삶의 전환//최순영,

구술자 최순영은 강릉 출생으로 유년 시절 부모가 일찍 사망하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강원도 강릉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약간의 기술을 배우다가 친구와 함께 서울로 돈을 벌러 상경한다. 처음에 도착한 곳은 마장동으로 들어간 직장은 너무나 허름하고 먹을 것도 상태가 나빠 다른 직장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YH무역이다. 구술자는 YH무역에서 손기술이 좋아 월급을 잘 받았으며, 노조지부장으로 선출될 때는 선배축에 드는 위치에 있었다.

 

 

YH무역을 다니면서 알게 된 노조운동가(섬유본조의 교선부장, 표응삼씨)가가 처음으로 다른 노조(반도상사, 동일방직, 원풍 등)의 여성지부장을 소개시켜줬으며 그의 추천을 통해 1976년에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45일간의 중간집단교육(수원 연수원 내일을 위한 집에서 토론식 교육, 1030명 정도 이수, 의식화교육, 촛불의식)을 받게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신인령 간사(1943년생, 30대 중반)가 여성 중심의 사업장에서 선발된 여성지부장 혹은 부지부장들을 모아 자본론 공부 등 훈련을 시켰다. 구술자는 YH여성노조가 다른 노조에 비해서 상당히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이는 노조원교육이 상당히 원활하게 잘 전개되었으며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자신은 물론 YH무역의 상무집행위원회 간부들이 크리스천아카데미에 가서 교육을 받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훈련받은 대로 조합활동을 이끌어갔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외에도 여성노동자프로그램이 별도로 있어서 19778년경에 진행되었다. 여성간부들끼리 상당히 끈끈했으며 1978년에 여성노동당을 만들자며 <여성노동당 기수회(20여 명)>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최순영은 크리스천 아카데미가 초기에 여성노동자들을 훈련시키는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을 받는 것을 계기로 남편이 된 황주석 선생(11기 교육 이수)도 만나게 된다. 구술자는 YH사건이 일어나던 해에 결혼(1979)을 했으며, 임신을 한 상태에서 투쟁을 준비했다. 초기 YH의 노조원은 다른 노조에서 남성들이 많은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에 남자는 자격이 없었고 여자만 2천여 명이었으며, 이후 15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때 남편인 황주석 선생은 자신이 하던 노동운동(한신대 신학생, 1978, 위장취업 1세대, 용접)을 그만두고 헌신적으로 YH노조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YH투쟁은 상집간부들이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통해 의식화가 된 이후에 전개되었다. 그리고 구술자가 공장 근처에서 자취를 하는 동안 상집간부들이 와서 자고 상당히 친밀하게 일상을 공유했다. 구술자의 결혼식은 1979714(종로, 동시입장)에 했고 투쟁을 위해 기숙사로 돌아왔으며 남편은 자취방에서 아내의 투쟁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투쟁 과정에서는 즐겁고 희망차게 할 것을 중시 여겨 연극이나 노가바 등도 진행했다. YH투쟁은 19793,4월부터 시작해, 7월 폐업권고를 거쳐 신민당사에 들어갔다가 경찰에 끌려나와 사태는 8월 말에 거의 끝났다. YH사건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구술자는 감옥에서 생활을 했다. 구술자는 가장 문제적인 인물이 투옥된다는 1인실에 수감되었으며, 임신한 상태로 지냈다. 출소 후 아이를 낳았다. 감옥에 있는 동안 목몸이 허약해져 80년대는 몸을 추스르거나 남편과 함께 마산에 내려가 지내기도 했다. 1980년대 구술자는 노동조합교과서로 사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YH노동조합사(남편이 부천에 살던 후배 천영초에게 도움을 요청, 최순영과 천영초는 감옥에서 같이 지내면서 알게된 사이)를 발간하고 당시 사망한 김경숙 열사 추모 작업에도 참여했다. YH무역사건은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80년대 대학생들이 현장으로 몰려드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등 사회적, 정치적 영향을 했다는 점에서 실패가 아닌 성공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980년대 전반기(1883년 혹은 1984년경)에 남편과 함께 전혀 연고가 없던 경기도 부천에 정착한 뒤 지역여성노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부천에 공장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가정폭력과 같은 여성운동과 단배자판기철거조례제정 운동등 지역을 기반으로 주부들과 함께 하는 주부운동을 1987년 이후 시작했다. 1989년에 여성노동자회를 하면서 같이 탁아소를 설립해 운영해 기혼의 여성운동자들이 지속적으로 노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 시민후보로 출마해 의원이 되었다. 1991년에는 있었던 지방선거는 31년 만에 부활된 선거로, 1991년부터 2회 당선되어 8년 동안 부천시의원을 무소속으로 정치활동을 했다. 당시 무소속 시민후보로 선거운동은 주부운동을 함께 했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같이 참여했다. 부천시의원하면서 학교무상급식운동도 전개했다.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의정지기단을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최순영은 부천에서 시의원을 하면서 지역운동과 자치운동을 겸비한 활동을 1990년대 초반부터 전개했다. 1979년에 YH사건이 발생한 지 거의 10년만에서 여성노동운동가에서 지역운동을 하는 활동가로 변화했다.

 

 

이후 진보정당의 추천을 받아 2000년도에 민주노동당 부대표로 들어갔으며 2004년까지 맡아했고 2004년에 비례대표(5)로 국회에 진출했다. 구술자는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 한 뒤 다시 부천으로 돌아와 지역운동에 지금까지 헌신하고 있다. 2021년 가을 현재 경기도 민관협치위원회 부위원장(2019~), 경기여성연대 상임대표(대표를 오래 하다 내려놓음), 부천YWCA회장 등의 활동을 해오고 있다.

 

 

구술자는 지역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이 상당히 강했는데, 이는 남편과 함께 1980년대부터 경기도 부천에 정착해 노동운동, 여성운동, 지역운동 등을 해왔던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부천에는 구술자가 설립한 단체가 3개가 있는데, 부천여성노동자회(회장), 부천 가정법률상담소(소장), 부천YWCA(회장), 현재까지 운영 중에 있다. 그리고 경기여성연대(1994 혹은 1995년경 출발)는 활동을 한지 20년 가까이 되고 있는데 지방자치가 대부분 서울 중심, 특히 수도권은 그런 경향이 더 강한데 경기지역을 근간으로 중요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