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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여성의 역사를 읽고 미래를 연다

구술자료

노동 현장과 함께한 일생, 전순옥

관리자 2022-04-05 조회수 37

노동 현장과 함께한 일생, 전순옥

 

구술자는 1954년 부산에서 태어나 세 살 때 가족이 다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집이 있던 남대문 근처 남창동에서 자랐고, 이때 늘 세 동생을 함께 데리고 다니며 서울 자하문밖, 한강, 뚝섬, 강나루까지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을 챙긴 큰오빠와 함께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419 전후의 혼란 속에 부모님의 경제적 상황이 나빠져 가족이 대구에서 몇 년을 살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산다. 구술자가 열여섯 되던 1970년 큰 변화가 찾아온다. 197011월 큰오빠 전태일(이하 전태일)의 분신을 하고 목숨을 잃은 것이다.

 

가족들이 대구에 살 때 전태일은 서울로 혼자 올라와서 구두닦기나 막일을 하다가 평화시장에 취직했다. 평화시장에 들어간 열여섯의 전태일은 미싱일을 했지만 사실 아버지 밑에서 시다도 하고, 미싱일도 했었다. 미싱사가 된 이후에는 재량도 많고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도 할 수 있겠다 싶어 재단사가 된다. 구술자도 열네 살, 열다섯 살 될 때 공장에 다니기 시작한다. 학교는 고등공민학교를 불규칙적으로 다녔는데 방학이 되면 전태일이 일하는 공장에 가서 일하기도 했다. 1969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본격적으로 전태일은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197011월에 분신한다.                                                                                                               

 

정부에서는 구술자와 전태일의 어머니인 고() 이소선 여사(이하 이소선)을 회유해 전태일의 장례를 가능한 한 빨리 치르고자 했고, 회유를 위해 큰돈을 가지고 왔지만, 이소선은 남은 삼남매에게 저 돈을 받으면 너도 공장 안 다녀도 되고, 뭐 계속하고 싶으면 학교도 다니고, 걱정 없이 살겠지. 그리고 안 받으면 너는 공장을 계속 다녀야 되고대신 받으면 학교도 다니고 우리가 먹고살고 다 하는데, 오빠가 원하는 거는 다 우리는 아무것도 못 한다. 오빠의 뜻을 이룰 수는 없다. 그런데 엄마는 오빠의 뜻을 이루겠다고 약속을 했다.”라며 물었고, 이에 구술자는 그러면은 받지 말아야지하면서 나도 나는 공장을 바로 이제 엄마 나는 공장에 다닐 거니까 돈 안 받아도 된다라고 한다. 이에 돈을 안 받았다. 돈을 받지 않는 대신 이소선은 아들의 뜻이었던 노동조건 개선을 약속하면 장례를 치르겠다고 한다. 시다들 월급 100% 올리는 것. 건강 검진할 때 꼭 엑스레이 필름을 집어넣을 것. 건강 검진을 꼭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것. 노동 시간을 열두 시간으로 줄이는 것. 일요일에 한 번씩 노는 것. 그리고 다락방 철폐하고, 환풍기 다는 것. 노동조합 설립하게 해줄 것이 그 조건이었다.

 

큰오빠가 죽은 뒤 평화시장을 다니기 싫어진 구술자는 1970년대 초반과 중반 기간에 인천에서 일본으로 양복을 수출하는 회사, 서울 마장동에서 가죽 코트를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여공들은 거의 시골에서 왔고 거기서 일하고 있었고, 공장에서 매일 밤 새벽 4시까지 야간작업을 했다. 식사도 너무 열악한 상황에 월급까지 받지 못하자 시위를 주도했던 구술자는 두 곳 모두에서 해고를 당했다. 1977년 이소선이 감옥에 들어가자 돈을 벌어야 해서 해고된 이후 구술자는 직전 직장의 미싱사들과 함께 다섯 명이 중부시장 근처에 공장을 열었다. 그런데 1979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계엄령이 내려지면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꼼짝을 하지 못하게 되자 회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공장은 문을 닫았지만, 공장에는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영래 변호사, 장기표, 김문수가 찾아와 위장 취업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소선은 1980년에 수배가 된 이후 81년에 구속이 된다. 이 시기에 구술자는 1981년부터 잠시 신학교를 다니다 자퇴를 하고 1984년부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학생운동하고 도망 다니는 집 아이들을 봐주는 탁아소였던 개구장이 어린이집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선생님 다섯 명이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요일도 없이 2교대로 근무하며 아이들을 돌봤다. 그와 함께 여성 노동자들이 같이 사는 공동체를 꾸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독일에서 한국 아이들을 입양하는 인간의 대지라는 단체에서 한국에서 해외입양 대신 직접 아이를 기를 수 있도록 후원할 방법을 찾던 중에 입양을 보내는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을 마련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고, 먼저 사람사는 정을 심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3년 후부터 인간의 대지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남의 돈 먼저 받아서 아이를 키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구술자는 1980년대가 끝나가던 198911월 영국으로 연수차 출국을 하게 된다.

 

구술자가 영국을 갈 때 처음 계획은 영어를 제대로 배우는 것이었다. 1988년 일본과 독일을 다니며 한국의 노동운동과 노동 상황을 설명하는 자리를 열었는데 통역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의 한계를 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통역을 해주는 사람도 구술자의 말에 감동이 되어 통역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통역해준 사람과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영어 공부를 권했다고 한다. 그런 경험을 한 구술자는 자신이 직접 영어를 배워서 한국의 이야기를 세계 노동자들에게 전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연수차 영국으로 향한다.

 

어학원 과정을 밟은 후 외국인 특별 전형으로 사우스뱅크 폴리테크닉 학교에 들어가 마친 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해 노동 사회와 디플로마 코스를 밟아 학부과정을 졸업한다. 다음은 워릭 대학에서 노동사회학으로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이때 구술자는 경제적으로 여력이 없어 석사 과정으로 진학이 어렵다고 하자 워릭 대학에서 장학금을 주어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석사를 마치고 국내로 들어오려고 할 때 석사 지도교수는 다시 예정에 없던 박사 과정 입학을 권했다. 당초 영어 연수를 위해 왔던 것이 학부와 석사에 이어 박사까지 이어졌고, 박사 과정에서는 영국 국무성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잠시 연수를 위해 떠났던 영국에서 12년이나 지내며 박사학위까지 받은 구술자는 그곳에서 교수직 제안이 있었음에도 다시 한국행을 택한다. 한국의 노동자들, 한국 경제 성장을 이루어낸 주역인 노동자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더 깊이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구술자를 기다린 곳이 여러 곳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 자리를 잡은 곳은 공장이었다. 직접 공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구술자는 창신동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5개월을 일했다. 현장은 그대로였다. 그 뒤 1년 간 성공회대학에 연구자로 자리를 잡지만 곧 창신동으로 돌아온다.

 

창신동에 돌아온 구술자는 여성 노동자들 조사 연구를 통해 아이들 교육 문제가 제일 필요한 것을 알게 된다. 맨날 엄마가 일하고 있는 공장 바닥에 엎드려서 숙제하는 아이들, 남들 보내는 영어 학원 같은 곳 못 보내는 것을 너무 한스러워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보며 영국인인 남편과 의논해 공부방을 열고 아이들을 봐주며 네이티브 영어를 가르치는 참신나는학교를 연다. 크게는 참신나는학교는 참여성노동복지터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참여성노동복지터는 아이들 공부도 가르치고 여성 노동자들 건강 정기 검진을 했고, 인터뷰 조사를 실시했다. 이후 2006년에는 수다공방을 열어 1970년대와 80년대 일을 시작한 분들이 글로벌 시장 변화와 기술 다양화로 기존의 기술만으로는 일거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단순 기술을 넘어 직접 코트까지 만드는 기술 과정을 교육하는 곳이었다. 수다공방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서 패션쇼를 열고 자기가 디자인한 옷을 모델과 함께 직접 입고 패션쇼를 했다                                        


                                .                                                                                        * 녹취록 전문은 우측 상단 첨부파일에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